IT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는 페이스북 계정도 없고 SNS라는 것도 남의 이야기다. 얼마 전 미술 작품들을 포스팅하려 인스타그램도 시작해 보았지만, 한 달 정도 하고 접어버렸다.
이런 내가 1년 전 미술 공부를 한다고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신기한 일인데 며칠 전 조금 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 온라인상에서만 알고 있던 분을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우리가 같은 도쿄 생활을 하고 있어 가능하게 된 일이지만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생각도 못 한 일이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ㅎㄹㅎㄹ라는 블로거님의 가마쿠라 여행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는데 어찌나 글을 재미나게 잘 쓰는지 그분의 포스팅을 모조리 찾아서 읽고 블로그의 팬이 되었다. 특히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여행 글들은 어디가 유명하고 어디가 맛있고 가 아닌, 발 디딘 낯선 곳을 단편 영화 한 편으로 엮어내는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ㅎㄹㅎㄹ님은 미술에도 관심이 있고 한 인사이트 하는 까닭에 나의 포스팅도 즐겨 읽는다. 이렇게 온라인상에서 서로의 글을 읽고 친해지다 보니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세상 참 좁다는 말처럼 알고 보니 마누라상의 고등학교 후배님이다. 뭐 고교 선후배야 그리 놀랄 우연도 아니지만 도쿄에서 외국 생활을 하다 알게 되니 우연함이 반가움이 되어 좀 오버하는 감이 있지만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간만에 테이블보, 초, 와인잔으로 식탁을 꾸며 후배님을 모셨다. 조금 이른 초저녁으로 시간을 잡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온라인의 글들로 파악되는 ㅎㄹㅎㄹ님.
1. 엄청난 모범생
2. 박식한 지식과 선수급 필력의 소유자
3. 놀랄만한 인사이트의 보유자
4. 술을 잘 못 마심
5. 위를 종합해 볼 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 잘 놀 줄 모르는 범생
전략 - 토요일 초저녁에 만나 건전하고 논리적인 이야기로 시종일관하다 일찍 마무리
그. 러. 나. 전략과는 상반된 결과! 무려 6시간이 넘도록 세 명의 이야기꽃이 만개하였다.
후배님은 1~3은 예상과 같았으나, 술도 잘 마시고 발랄한 성격에 붙임성도 있고 이야기도 술술 재미나게 하는 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오지도 않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하는 개인기도 있다!!
와인이 4병째로 옮겨갈 즈음 장국영이 라이브로 부른 '월양대표아적심'을 틀었는데 후배님이 엄청 반가워하더니 고등학교 때 배웠다며 "와~가사가 아직도 생각나네" 하더니만 아이 패드의 가사를 보며 굉장히 열심히 따라 부른다. 허밍이 아닌 꽤 진지하면서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교 시절 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듯 자신만의 필을 잡았다. 마누라상과 나는 느닷없는 후배님의 개인기에 한참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후배님이 다녀간지 나흘이 지났지만 오늘을 포함하여 거의 매일 그날의 열창을 이야기하며 마누라상과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데 한참은 갈 것 같다(두어 달 정도).
그나저나 '월양대표아적심'은 내가 십수 년 동안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잡을 때 듣던 노래이건만 이제는 전혀 다른 느낌의 복잡한 노래가 되었다.
그렇게 웃고 즐기며 6시간을 보낸 후 마누라상과 함께 후배님을 근처 역까지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 오늘 재미나게 잘 놀았다" 하며 밤 산보를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한국말을 하며 이렇게 몇 시간을 놀고 마신 것이 아마 3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믿기지 않지만)
재미나고 인사이트 가득, 거기다 개인기까지 장착한 만능 후배님이 다음에 또 놀러 올 때는 어떤 즉흥 퍼포먼스가 나올지 모르니 탬버린도 준비하고 멍석을 대신해 요가 메트도 깔아놓아야겠다.
Happy Korean Night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