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흐르는 5년 단골 치과
일정이 몇 개가 겹친 보기 드문 하루였다. 첫 볼일은 치과 진료로 전에 살던 시로카네 다카나와에 있는 아담한 치과를 찾아가는 일.
엑스레이를 찍고 의자에 누워 내가 처음 방문한 날과 오늘의 구강 사진들을 비교하며 설명을 하던 의사 선생이 "와 처음 오신 게 벌써 5년 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씀을 하신다. 나도 이렇게 한 곳을 오래 다닌 것이 처음이라고 얘기를 하니 내가 자신 병원의 가장 오래된 손님이란다. (흠~먼지 모를 자부심이~)
진료 베드에 누워 스케일링을 받으며 생각해 보니 오는 6월이면 도쿄 이주 만 6년이 된다. '6년 세월 참 빠르구나'하고 생각하다 몇 해 남지 않은 내 40대도 이렇게 또 후딱 지나버리는 건 아닐지 생각하니 마음이 또 조급해진다.
이곳 치과에 올 때마다 나는 열심히 일본어를 쓰려고 하는데 간호사 상들은 매번 영어를 열심히 쓰려고 하신다. 누워있는 내게 "마우스 오픈 프리즈~, 바이트 프리즈~"(뭘 씹을라는 거지?)
재즈가 흘러나오는 깔끔한 동네 치과는 진료 베드도 4개로 아담하고 조용하다. 뭔 두부를 다듬듯 조심스레 나의 이빨들의 청소를 마친 간호사 상이 "두유 라이크 드링킹 커피 올 레드와인?" 하고 물어보길래 치과에서 진료 후 서비스로 커피나 레드 와인을 권하지는 않을 것을 깨닫느라 잠시 텀을 두고는 일본어로 "와타시와 코히와 노마나이가 아까와인 다이스키데스, 미즈노 요유니 논데이마스"라고 대답했더니 조용하던 동네 치과 여기저기서 ㅋㅋ거리는 웃음소리가 삐져나온다. 다른 베드에 있던 의사 상도 껄껄거리며 웃어대었다.
"나는 커피는 안 마시는데 와인은 아주 좋아해서 물처럼 마시고 있어요"라고 한 것뿐인데 이리 다들 입을 틀어막고 웃어대니 살짝 난감했지만, 유머에 인색한 일본 사람들에게 잠깐 웃을 참을 주어 기분은 좋다.
조금 힘겨운 시부야
전시회 하나를 보고 여름옷 몇 벌 사볼 참으로 오래간만에 시부야를 찾았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Adriana Oliver라는 스페인 여성 작가로 일본을 비롯한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에 두터운 지지자들이 있는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갤러리 타깃이 아드리아 올리비아를 리프리젠트 하는데 , 이번 개인전은 시부야에 대형 전시실을 가지고 있는 SAI와 공동으로 진행 중이다.
옥션 프리뷰에서는 몇 차례 그녀의 작품을 접하였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실제 전시를 나름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감이 전혀 오지 않는다. 눈을 잃어버린 채 강조된 크기의 얼굴과 어릴 적 동네 사진관에 걸린 가족사진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을 바라보니 음식이 동이 난 뷔페식당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내게는 인기가 없지만, 매번 사전 판매 완료로 붉은 스티커를 뒤집어쓴 채 전시를 시작하는 그녀의 작품을 다른 컬렉터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 열심히 작품을 바라보고 사진도 찍고 하였지만 소득은 없었다.
'역시 현대 미술은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구나'하는 선에서 관람을 마무리.
전시 관람 후 코에 호텔로 발걸음을 해보았다. 다음 주 오키나와 여행 때 입을 반팔 티를 몇 벌 사볼까 했는데 웬걸! 호텔이 문을 닫았다. 쉬는 날이 아니라 망했다. 간판이 내려진 채 검은 커튼에 창문이 휘감겨 흉물스럽게 시부야의 언덕에 버려졌다. 징그러운 코로나로 직장을 잃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잠시 건물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가 곧 다가올 멘붕의 전초를 감지하고는 마누라상과 급히 와인바를 찾아 나서 미야시타 파크에 위치한 카페에서 스파클링을 한 잔씩 마시며 뭔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 시부야의 오후를 진정시켰다.
사실 처음 발걸음을 한 미야시타 파크도 내게 불편한 기운을 쉬지 않고 불어넣고 있었다. 시부야 한복판에 들어선 대형 프로젝트인 이곳은 만들다 만 듯 엉성함이 여기저기 보였고 특히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연령대인 교복의 10대와 젊은이들을 살짝 밀어내고 있었다.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빈자리가 넘쳐남에도 주머니가 가벼울 젊은이들은 그 주변에 놓인 벤치며 계단에 촘촘히 들어앉아 카페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음의 거리 시부야의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미야시타 파크에서는 젊음은 그리 환영받지 못해 보였다.
2에서 4가 된 친구들
이날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작년 말 만삭으로 배가 불룩 나왔을 때 본 친구들을 만나러 다이칸야마로 갔다.
내가 쿵후 걸이라 별명을 지어준 중국인 W 양과 프랑스 사나이 A 군 그리고 이들의 유전자를 나란히 공유케 된 O 양을 만났다. 매번 둘이 나타나던 친구들이 애완견 오이스터 군까지 4명이 되어 약속 장소로 들어오는 풍경이 다소 낯설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꽤나 궁금했던 생후 60여 일의 공주님은 엄마 아빠보다 약간 진한 피부색을 한 채 유모차에 누워 열심히 자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심하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 얼마 없는 머리에는 여자아이임을 알리기 위해(엄마 왈) 진한 겨자색 밴드를 두르고 신기하리만치 두품 하고 일괄된 모양의 손가락을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뚫어져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내게 W 양이 O양을 안아보겠냐며 물었지만,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아 사양했다.
(아저씨가 안아주진 못하지만 건강하고 예쁜 아이가 되다오~)
O 양 미모에 관한 칭찬은 자연스레 그녀의 출산 에피소드로 옮겨졌다.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나온 O 양의 성급함에 엄마는 급히 병원으로 가야 했고 코로나로 철저한 격리가 시행되고 있는 병원에서 아빠도 간병인도 없이 5일간 병실에 홀로 남겨졌으며 심지어는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고 세상에 나온 순간, 안아 보기는커녕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간호사들이 아가를 격리하려 데려가는 바람에 울음을 꾹 참아야 했다고. 그 둘 부부가 자신들의 아기를 안아보기까지는 모두의 코로나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온 나흘 후였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는 일본 정부에 대한 푸념과 칭찬으로 이어졌는데, 홀로 병실에 남긴 엄마에게는 일본 후생성에 제출하여야 하는 엄청난 양의 페이퍼 워크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서류의 양이 워낙 많은 데다, 프랑스 여권을 받기 위해 중국 영사관, 프랑스 영사관에도 제출하여야 하는 서류까지 어마어마한 업무에 시달린 엄마는 아기를 간호사들에게 빼앗길 때에도 꾹 참았던 눈물을 서류 앞에서 쏟아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기의 임신부터 출산까지 병원비 1엔도 지급하지 않고 고급 리조트 수준의 의료 시설에서 닷새를 보내게 하는 일본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은 놀랄 만큼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모두 출산 과정을 통 들어 쿵후 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기간의 금주라고 하니 조만간 모유 수유가 끝나 금주령이 해제되면 거한 와인 파티를 하기로 하고 한 시간여의 수다를 마무리했다.
2의 뒤풀이
4가 된 친구들과는 달리 꾸준히 2인 우리는 긴 일정을 마무리하려 롯폰기로 이동해 둘만의 파티를 시작했다. 먼저 최애 와인 바인 에노테카에서 시원한 로제로 치유를 시작했다.
와인과 함께한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쿵후 걸과 프랑스 사나이의 초대, 오키나와 여행을 위한 와인 공수에 관한 두 가지였는데 5일간의 오키나와 여행에 몇 병의 와인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직도 이야기가 진행 중이고 쿵후 걸 부부의 프랑스 여행 제안은 실행 불가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쿵후 걸 부부는 8월부터 프랑스 이곳저곳을 반년 정도 여행을 할 계획인데 그중 프로방스 지역에 집을 빌려 오래 체류할 계획이니 우리에게 놀러 오라는 제안이다. 프랑스 남부의 전원주택에서의 휴가라~ 구미가 훅~당기기는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가 풀리면 바로 효도 여행이 줄지어 있으니 4 친구들의 제안은 힘들 듯!
그나저나 4가 된 친구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이주하였는데 처음 보았을 때는 둘이 연인 사이였던 그들이 결혼을 하고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넷이 되었다. 몇 없는 도쿄에서의 친구들인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구성원의 수를 늘려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O 양이 어떻게 커갈지도 궁금하다.
우리는 끝없는 수다와 함께 와인 한 병을 게눈 감추듯 비우고 집 근처에 처음 가보는 중식당에서 그다지 맛있지 않은 하이볼과 요리를 별생각 없이 먹고는 집에서 레드와인으로 2인 회식을 이어갔다.
가요를 들으며 오늘 본 전시, 번잡한 시부야, 4가 된 친구들 얘기를 하며 수다를 떨다가 뭐에서 필을 받았는지 흥이 난 마누라상이 김범수의 보고 싶다가 나오자 팬터마임 연기를 시작했다.
죽을 만큼~에서는 자신 목을 쥐어짜고, 보고 싶다~에서는 두 손을 둥글게 해 눈에 가져다 대고 망원경을 보듯 앞뒤로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나도 곧 합류하여 둘이 집이 떠나가라 깔깔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웃기도 하고 바닥에 누워 때굴때굴 구르며 2인 회식을 즐겼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둘일 우리,
2가 좋다!
둘이어서 좋은 하루가 이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