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도쿄 금주령이 풀린 첫날, 실로 오래간만에 술을 곁들인 외식을 했다. 부부동반으로 미녀 큐레이터 E 상과 그녀의 남편과 함께 미나미 아오야마의 수상하게 맛있는 야끼니꾸 집에서 3시간 동안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코로나로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산지 언 2년, 잊고 지내던 사람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을 걸쭉하게 느꼈다. 게다가 T상이 고향인 와카야마에서 그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감까지 싸 들고 나와서 건네주는 바람에 가슴이 뭉클.
연말 송년회는 T 상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해 진수성찬을 차려주기로...
즐거운 사람들과의 만남과는 다르게, 그렇지 않은 만남에서 오는 대미지는 무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코로나가 아니어도 사람 만나기가 줄어드는 요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며 살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와카야마의 감과 같은 모양을 한 사람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다.
토요일은 금요일의 숙취로 부부가 사이좋게 하루 종일 시체놀이를 하고 일요일 다시 회복된 간을 장착하고 하라주쿠로 출정하였다. 이날은 사회적 거리 좁히기가 두건!
먼저 찾은 곳은 요즘 개인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캠페인인, 'Z세대 알아가기'의 일환으로 찾아간 Tokyo Nights Vol. 2라는 전시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Joe는 도쿄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인 독립 큐레이터로 스트리트 아트 전문 플랫폼인 Jumpjump Tokyo를 운영하고 있다. 마침, 갤러리 타겟(Gallery Target)의 A 상도 이날 전시를 보러 온다고 하여 그녀도 만날 겸 이 전시를 찾았다.
그러나 '역시 Z 세대의 감성에 다가가기에 난 너무 올드한 걸까?' 맘에 드는 작품이 한 점 없다. 몇몇은 식상할 정도로 보아온 작품들이고 몇몇은 작품인지 인테리어 소품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그림들뿐. 정성이 들어가고 나쁘지 않은 기획의 전시회지만,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전시에서 남는 건 하라주쿠 경치가 멋진 옥상에서 사진을 찍은 예쁜 마누라상과 정수리가 나의 두 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Joe가 과연 모발 이식 시술을 할 것인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뿐.
다음 목적지는 딱히 하는 공부는 없지만, "내 공부방"이라고 부르는 곳의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러스트 아티스트 미도리 오기야의 개인전이다. 장소는 하라주쿠 뒷골목에 위치한 일러스트 전문 갤러리인 L’illustre Galerie LE MONDE.
100엔짜리 생활용품 기업에서 상품 광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그림 그리기를 사랑하는 겸업 작가다. 3년 전 그녀의 개인전에서 알게 된 후 작품도 여러 점 소장하고 지금은 두어 번 술도 마신적이 있는 나름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다. 엉뚱한 재치가 살짝 가미된 그녀의 작품들처럼 그녀 역시 엉뚱한 캐릭터다. 한 번은 한국말 할 줄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해 보라 했더니만 "사와디 캅~"하여 마누라상과 나를 빵 터지게 한 적도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엉뚱함이 있으면서도 한참을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번 전시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이라는 타이틀로 같은 포즈를 한 여성이 요일별로 다른 옷을 입고 커다란 몸 짓을 하는 3개의 연작 시리즈와 일러스트로는 대형 작품인 50호의 스트레칭하는 여성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한 점 한 점이 앙증맞아 한참을 감상했다.
3년 전 내가 컬렉션 한 6점이 그녀의 공식적인 첫 작품 판매였을 정도로 무명 아티스트이던 그녀가 지금은 자신이 그린 작품을 한 책 표지의 소설이 5권이나 출간되고 여러 잡지들에도 기사가 실리며 인지도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데 컬렉션의 즐거움은 이럴 때 배가 되는 것 같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녀의 전시를 꼭 한번 기획해 보고 싶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날은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녀의 일정이 다소 빡빡해 보인다. 6시 전시 종료 후 작품을 내리는 작업을 하고 이후 남편, 갤러리 주인과 함께 갤러리에서 간단한 뒤풀이가 예정돼있고 다음날 일찍 출근을 한다고 하니 '겸업 작가의 고충이 이런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갤러리 타겟의 A 상과 오모테산도 Emporio Armani Caffe에서 모히또 한 잔씩을 했는데, 처음 가보았지만 칵테일이 엄청 맛있고 가격도 착하다.(모히또 ¥1400) 오모테산도에 갈 일이 있으면 식전주를 위해 자주 들르기로..
어제 A 상과의 대화는 주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로카쿠 아야코(Rokkaku Ayako)였다. 얼마나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작품을 받기 위해 commission work를 요청하고 있는지를 듣고 깜짝 놀랐다. 또 최근 유럽의 모 국가에 스튜디오가 딸린 저택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였고 내년부터 있을 입이 떡 벌어지는 대형 전시 스케줄에 관하여 들으며 그녀의 인기를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영광스럽게도 내년에는 우리 부부도 그녀와 조우할 기회가 생길 지도^^
A 상과 헤어진 후 마누라상과 둘이 오바카나르(AUX BACCHANALES)로 자리를 이동해 간단한 저녁을 겸해 와인을 마셨는데 이곳은 하라주쿠 역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라스가 있어서 자주 찾는 곳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새로 생긴 하라주쿠 역사는 운치가 넘쳐흐르던 철거된 옛 역사에 비하면 멋이 없다. 2년 전 하라주쿠 구 역사의 철거 당시, 반대 여론이 많았지만 지진 등의 자연재해에 취약하다는 진단이 나오면 어떤 건물이건 가차 없이 허물어버리는 안전의 논리가 보존보다 우선순위인 일본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철거는 종종 있는 일인 듯하다.
그나저나 와인 한 잔을 하다 보니 미도리 상의 전시가 생각난다. 지난 전시회 때마다 늘 작품을 구매했었는데 이번에는 와인만 건네고 돌아온 것이 살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하라주쿠 뒷골목의 조그마한 갤러리에서 작품 철수 작업을 하고 있을 미도리 오기야와, 엄청난 글로벌 전시 스케줄을 가진 로카쿠 아야코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둘은 일본인이며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고 정규 미술 교육이 아닌 디자인 전문대학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미도리는 늦은 시간까지 노동을 한 후 내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통근 전철에 몸을 실어야 하고 로카쿠는 아름다운 지중해의 햇살을 만끽하며 모든 아티스트가 꿈꾸는 아침을 맞이한다. 미도리는 전업 작가를 꿈꾸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주말에 짬을 내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고 있고 로카쿠는 저택에 딸린 스튜디오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려 영감을 떠올린다.
두 여자의 작품 모두 사랑스럽기 그지없지만, 오늘은 삶의 냄새가 풍기는 미도리 상의 작품들이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인다.
엉뚱한 작가, 오기야 미도리와 전업 작가를 꿈꾸는 모든 아티스트들 간바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