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시작된 일요일이 마누라상의 눈물로 마무리 될지는 몰랐다.
평소 건강상 맥주와 고기를 멀리하며 살고 있지만, 이 날은 맘먹고 즐겼다. 히가시 시나가와東品川에 있는 나의 최애 수제 맥주인 T.Y Harbour에서 행복한 맛의 맥주를 두 잔 마시고는 2차로는 오래간만에 야키니쿠 식당에서 고기와 레드와인을 배에 잔뜩 넣어 guilty pleasure를 지칠 때까지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 도쿄의 최저 기온은 9도여서 서울에 비하면 춥다는 표현은 쓰기 어색할 정도이지만,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집에서는 올 겨울 처음으로 히터를 틀었다.
밖에서 꽤 마신 탓에 걸쭉해있었지만, 음주 부부는 입가심이 필요하다며(도대체 입에 뭐가 쌓였길래 매일...입가심 타령...) 딱 한 병만 마시기로 하고 레드와인을 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라상이 엄마랑 전화하고 싶다며 장모께 카톡 통화를 시작했다. 장모 댁에는 마침 처남이 아들, 딸들을 데려와 아가들의 재롱을 보며 장인, 장모가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스피커폰으로 아가들의 재롱 소리를 들어가며 마누라상이 장모님과 20여분 이상을 전화를 한 것 같은데, "엄마 안녕~또 통화해~"하며 잘 마무리 인사까지 하고 나서 전화를 끊은 마누라상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그냥 찔끔 흐르는 눈물이 아닌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어도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잘 알만했다. 2019년 10월에 장인, 장모를 모시고 니가타新潟로 골프 여행을 함께 다녀온 후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엄마, 아빠를 보지 못했으니 전화기 너머로의 목소리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보고품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마누라상의 옆으로 다가가 안아주며 다음에는 영상 통화를 해보면 어떨까, 무리해서라도 한국에 다녀올까 얘기를 해보며 달래 보았지만 한번 시작된 울음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내년 1~2월이면 하늘길이 좀 자유로워지려나 생각했었는데, 오미크론이라는 변종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한국 가기가 더 힘들어졌다. PCR 검사는 수시로 받아야 하고 한국에서 자가격리 10일, 돌아와서 일본 정부 지정 시설에서 6일을 격리해야 한다니 웬만해서는 갈 수가 없다.
코로나라는 돌림병이 존재하기 전에는 한 해에 두 번은 한국으로 출장을 가고 두 번은 장인, 장모께서 일본으로 여행을 오셔서 1년에 4번 정도는 함께할 기회가 있었는데 2년이 넘는 시간을 카톡으로만 왕래하다 보니 그리움이 채워질 수가 없다.
동갑내기 부부의 장녀로 태어난 마누라상은 내가 생각해도 장한 딸이다. 장모님은 "00는 언제나 내 자랑이었고, 어느 모임에서 누구를 만나던 자식 이야기가 나와 내가 우리 00 얘기를 해주면 다들 제 자식 자랑하던 이야기가 쏙 들어갔었다"며 딸 사랑과 자랑을 내게까지 하곤 하신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대부분이 부러워하는 학교에 척척 들어가서는 과외 선생으로 인기를 날리며 대학 4년을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들의 입사 0순위 기업에 입사까지 하였으니 장인, 장모라면 입이 닳도록 딸 자랑을 하고 다니셨을게다.
이제 마흔이라는 나이도 넘긴 그녀는 가끔 발견되는 자신의 흰머리에 갖은 욕을 해대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출근길이 흥겹다"라고 내게 말할 정도로 자신이 좋아라 하는 회사에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국에 본사를 둔 A사의 도쿄 지사에서 APAC의 리크루팅을 담당하고 있는데 마케팅에서 채용이라는 꽤 상이한 커리어의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의 업무를 즐기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 입장에서도 대견하다.
하긴 십수 년 전 지 남편으로 나를 뽑았으니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는 여자다.^^
그래도 보고 싶은 엄마, 아빠 앞에서는 아직 소녀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울음을 달래던 내가 꾀를 좀 부려보았다.
"근데 너 나를 한참 못 보게 돼도 이렇게 울 거야? 난 너랑 피가 섞이지는 않았으니 이렇게 펑펑 우는 일은 없겠지. 장모님은 좋겠다. ㅇㅇㅇ가 이렇게 사랑하니" 그러자 그녀는 와인과 눈물에 시뻘게진 눈을 내게로 돌리고는 "내가 오빠를 못 보면 어떻게 안 울 수가 있겠어? 아니 우리는 못 보고 사는 일이 없어야지. 난 오빠 없으면 못살아"하며 소파 건너편으로 넘어와서는 내게 안겼다. 훌쩍 거리는 마누라 상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잠든 마누라상을 깨워 함께 양치질을 하고는 안방으로 가 바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내가 언제 울었냐는 둥 입 주위에 레드와인의 흔적을 간직한 채 세상 행복한 얼굴로 쿨쿨 자고 있는 마누라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2년 넘게 엄마, 아빠 보고 싶어 하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나 없이는 못 산다니 고맙기도 하고, 쿨쿨거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코로나라는 돌림병이 부모에의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게 하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특별한 시간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누라상과 내가 은퇴하고 노년이 되서나 경험할 수 있는 "매일 24시간을 둘이서 보내기"를 2년 가까이 가능하게 하고 있다. 마누라상의 눈물은 내게도 슬픔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들이다. 코로나가 사라지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때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제 충분하다.
2년간 충분히 감사하고 소중했으니 길고도 질긴 돌림병이 사라지고 보고 싶은 가족들, 그리운 사람들 모두가 서로 부둥켜 기쁨의 눈물을 맘 놓고 흘릴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