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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inArt Jan 08. 2022

어쩔 도리가 없는 도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2022 메리 크리스마스

2022년 1월 6일 도쿄 미나토구 14:00

창밖을 내다보다 그만 에릭 클립톤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크게 틀었다. 올해 크리스마스까지는 꼬박 12달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창밖 도쿄스럽지 않은 풍경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에릭 형님은 어떻게 캐럴을 이렇게 끈적끈적하고 멋진 블루스로 바꾸어 놀 수 있는지 들을 때마다 경이롭다. U2의  Christmas와  Slade의  MerryXmas Everybody를 연달아 찾아들었을 즈음, 해야만 할 것이 생각났다.


14:30

마누라상이 회사에 지각을 한 사람처럼 집을 뛰처나갔지만, 사실 장을 보러 슈퍼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마늘을 썰고 김치와 반찬을 빛의 속도로 준비를 하며 상을 차렸다. 주야장천 놀고 있던 고기 불판을 꺼내고 테이블 위는 신문지로 덮어주어 처음으로 집에서 삼겹살 파티를 시작했다. 고기만 먹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소주와 맥주도 준비했다.


 아직 대낮이고 소맥 안 마신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도쿄 하늘에서 3년 만에 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어 소주 한 병, 맥주 두 캔을 마누라상과 가뿐하게 날려주셨다.  


이번에는 재즈를 틀어보았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 갔을 때 울려 퍼지던 Miles David의 Round About Midnight을 앨범 통째로 듣고, 가나자와(金沢)에 있는 재즈바 보쿠텐에서 들었던 Kenny Rurrell의  Masters 앨범도 찾아들었다.


창밖엔 펑펑 쏟아지는 눈, 테이블 위엔 지글지글 삼겹살과 소맥 그리고 스피커에선 구수한 재즈, 뭔가 어울리지 않을 듯했지만 수상할 정도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16:20

행복한 점심을 마치고는 집안 곳곳에 스며든 겹살이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설거지에 바닥 청소까지 열심히 하고 뜨거운 물에 샤워도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마누라상이 "레드 한 병 마실까?"하고 물어본다.

이미 소맥을 마시고 아직 5시도 안된 시각이긴 하지만 나는 창밖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래"하고 대답했는데 함박눈으로 변한 도쿄 하늘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첫곡으로 러브스토리의 OST 중 Floric을 들었는데 실제 눈 풍경 보며 듣고 있자니 아찔했다. 다음으로는 가요 중 겨울 노래를 생각해 봤다.


김현식의 눈 내리던 겨울밤

박정현 그 겨울

푸른 하늘의 겨울 바다

조정현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미스터 투 하얀 겨울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마지막으로 브로커리 너마저 1집(2집은 화가 날 정도로 형편없다)을 첫곡부터 마지막곡까지 들었다.

한 시간여를 마누라상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각자 눈과 음악만을 즐겼다.


17:00

어둠이 내리고 눈발이 약해지니 집 앞 작은 공원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도쿄에서 귀하디 귀하신 쌓인 눈을 즐기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곳곳이 누런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가본 적 없는 삿포로 어디쯤의 크리스마스이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누라상과 나도 완전 무장을 하고 눈놀이를 해볼 생각으로 밖으로 나가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곳을 골라가며  발을 디뎠다. 무지무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뽀드득"의 소리와 감촉에 황홀해져 공원 구석구석을 눈 만난 개처럼 활보했다.


17:30

아직 시장기는 없지만 저녁은 먹어야겠어서 집 근처의 "이탈리안은 서민의 음식이다"라는 다소 의아한 슬로건을 표방하는 사이자리아라는 레스토랑으로 3차를 위해 이동했다. 가성비 250% 정도 되는 이곳은 술이 걸쭉할 때 배를 채우러 가끔 찾곤 하는데 어제는 피자와 1100엔이라는 가격이 믿어지지 않는 스파클링 한 병을 눈 깜짝할 사이에 마셔버렸다.


조금씩 걸쭉 해저가며 며칠  못한 수다를 부지런히 털어냈다. 마누라상은 얼마 전 처음 만난 할리할리 님에 관하여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의외로 놀라운 얘기도 있고 해서 아주 재미나게 들었다. 사람 보는 눈 까칠한 마누라상도 즐거운 만남이었다고 해서 조만간 같이 보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엊그제 통화한  동생 이야기를 마누라상에게 해주었다. 애기들 학교 때문에 최근 이사를 했고 내년에는 둘째도 초등학생이 되는 얘기며, 사업도 순풍을 타고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마누라상도 재미나게 들은 듯하다.



19:00

길이 곳곳에 얼어붙은 신기한 풍경을 보며, 술 먹고 길에서 자빠지면 여러모로 모양새가 안 좋으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왔다.


둘 다 이미 걸쭉해졌지만, 마누라상이 디저트인 양 화이트 한 병을 더 꺼내 왔다. 더 들어갈라나? 하며 먹기 시작한 와인이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넷플릭스로  "그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를 틀어 놓았지만 티브이보다는 6년의 도쿄 생활 동안 처음 접해보는 흰 눈 세상을 더 자주 내다본듯하다.


그리고 곧, 하얀 바깥세상처럼 두 부부의 기억도 새하얗게 사라져 갔다.


2022년 1월 7일

아침부터 어질어질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 와인 3병, 소주 1병, 캔맥주 2개 부부 둘이 마신 술 친곤 많다.


그래도 기적을 보고 있는 듯한 어제의 풍경에 정말이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황홀하고 즐거운  도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2022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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