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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파도를 잘 이기고 있는 조카의 힘은 몰입이었다

엄마 에세이

by 치유빛 사빈 작가

"내가 오늘 밤에 언니 집 가도 돼"

갑작스러운 동생 전화에 언제든 오라고 환영했다.


몇 달만의 친정집 외출이었다. 밤 10시가 넘으니 초인종이 울렸다. 버선발로 현관문을 여니 제부가 동생을 부축한 채로 문 앞에 서있었다.


"어서 와. 들어가자" 동생을 부축해 거실로 인도하고 제부는 자신의 집으로 보냈다.

동생 동네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거리가 꽤 있다. 사상구와 남구. 자동차로 이동하면 40분 걸리는 거리이니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게 되면 1시간 30분 소요가 된다.


올해 초 다리 마비가 되지 않을 때 한 손으로 운전해서 매일 집으로 놀러 오던 녀석이 갑작스러운 다리 마비로 운전은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동생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안심이 되었다.


병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말처럼 자신만 알고 있던 병에 대한 결말을 가족과 나누고 나서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더는 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암에 대한 음식을 연구하고 그걸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서로 공유했다.


여니는 이모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너무 기뻐했다. 이모 옆에 딱 붙어 친구처럼 장난을 쳐주는 이모가 그저 좋은가보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데도 자매 수다는 줄어들지 않았고 조카와 이모 장난은 그만 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동생도 잠자리에 들었고 여니도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 다음날을 위해 잠을 잤다.


다음 날 내가 먹고 있는 디톡스 한잔과 식이섬유 라테 한잔, 항산화가 가득한 커피를 챙기며 가볍게 식사를 했다. 늦게 잤으니 늦잠은 당연한 일. 오후 2시쯤 배 고파 매생이를 넣은 죽을 끓여 다양한 버섯과 양배추를 찜기에 찜 후 간 없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효나야 우리는 일상 패턴을 다 바꿔야 해. 그래야 건강을 찾을 수 있는 거 같아. 늦잠 자던 습관을 버리고 한 시간 일찍 자는 습관을 들이고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아주 가볍게 먹는 거지.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 잠이 오면 나와 약속하는 거야. 딱 한 시간 정도 자는 거야. 알림을 맞춰놓고 자면 더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잖아. 나와의 약속 꼭 지키면 소소한 성취감이 들어. 내가 해냈구나. 뭐 그런 감정들로 오늘 하루가 멋지게 마무리되거든. 물론 음식은 몸에 좋은 것만 먹고. 그러니깐 내 말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거지"

"그게 쉽지 않아. 왜 그럴까?"

"그건 당연한 거야. 사십 년 넘게 해온 패턴을 하루아침에 고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잖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야.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부터 하는 거야. 내가 부종이 심한 세월을 거슬러 생각해보니 아침은 없고 정오에 일어나 밤늦게 잤던 것이 부종을 키웠던 거 같았어. 그 전에는 너도 알다시피 밤 10시이면 잤고 아침 7시면 일어났던 나였는데 하루아침에 패턴을 바뀌니 몸은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다 부종이 온 거 같아. 7년 전 정상적인 패턴을 뒤집었으니 몸은 힘들었을 거야. 건강한 수면 패턴이 아니었던 거지. 누군가에게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오히려 건강하다고 말하지만, 난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어. 해보니 알겠더라. 알아버렸으니 고쳐야지. 나에게 맞지 않은 방법을 버리고 나에게 맞는 패턴으로 돌아가는 거. 그게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거 같아. 난 몸으로 반응해서 알아차리기 쉬웠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여니 유치원 차량이 아침 8시 30분에 오거든. 어쩔 수 없이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 패턴이 다시 주어진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는 것만으로 좋은 에너지가 쌓였고 기분이 참 상쾌했어. 상황 때문에 패턴이 바뀌었지만, 인간은 변화된 생활에 금방 적응했어. 너도 힘들겠지만 강한 의지로 한 번 해봐"

"그러고 싶은데..."


푹 끓인 매생이 죽을 먹으며 자연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반찬은 동생도 제법 잘 먹었다.

내 습관이 내 건강을 좌우한다는 것을 동생에게 말했다. 그동안 해온 습관이 내 몸을 힘들게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습관을 개선해야 한다는 말을 수면으로 비유해 말했다. 동생은 그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리라 믿으며 제부가 올 때까지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자연산 매생이가 많아서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고 오전에 끓여두었던 육수 두팩과 버섯을 나누어 주며 동생 몸에 필요한 자연 음식 위주로 먹으라고 당부했다. 정 힘들면 엄마에게 도움 요청하고 언니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절룩거리며 걷던 동생은 하루 종일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며 제부 손을 꼭 잡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의지가 약한 동생은 이번 계기로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배꼽을 잡았고 슬픈 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며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 토론했다.


"나도 엄마라서 고등학생 엄마라서 이번 사고가 믿어지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 동생을 바라보니 이번 사고로 이 세상을 다 살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간 고인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더 많은 슬픔을 느끼기 전에 웃긴 영상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배고파" 동생 말에 그리고 딸 말에 "고구마 있는데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줄게. 먹고 가" "그럴까" 미안해하는 동생을 위로하며 아주 맛있게 구워낸 고구마를 딸과 이모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조카는 갑자기 변해버린 엄마 모습에 슬픔을 그림과 공부에 몰입하고 있다고 했다.

"워니가 요즘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 이상해. 내 딸 같지 않아"

"그 아이가 아무래도 엄마 앞에서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공부에 몰입하나 보다. 너도 그랬잖아. 가족 형태가 불안정해서 너도 공부에 몰입했고 전교 1등 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나"

"워니는 공부에 슬픔을 달래고 있어. 너와 닮은 구석이 있네. 그 아이에게 응원만 보내. 잘하고 있다고"


어느 날, 슬픈 눈으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던 조카는 "정상이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팔이 마비되고 몇 개월 뒤 다리가 마비되는 일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라는 조카 감정을 동생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일은 늘 힘겹다. 받아들이기에는 그 슬픔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진다. 아마 조카가 느꼈던 감정이 큰 파도가 밀려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큰 파도에 부딪혀야 한다. 큰 파도가 잠잠해지면 또 다른 파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다가온다. 해결한 파도를 교훈 삼아 다음 파도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거. 그게 인생이다.


조카는 너무 이른 나이에 큰 파도와 맞닿아 혼란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자신에게 또 다른 삶을 살아갈 힘을 비축한 거라고 말한다. 불행 뒤 숨어 있는 행복을 찾는 건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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