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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그 무거운 단어가 힐링이 되도록 책에 실었어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다

by 치유빛 사빈 작가

안녕하세요.

벌써 3월 말이네요.

여니가 학교 입학한 지가 25일이 되었고요.

오매불망 기다리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버스 정류소를

찾았는데요. 정말 추웠어요.


맹렬하게 추운 한 겨울보다 지금 추위가 살갗을 아리게

했어요. 다행히 버스가 두 대 연달아 와서 조금은 복잡하지

않은 차를 타고 등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가만히 저를 들여다보면 그저 고맙고 감사한 일만 가득했어요.

출간했다고 연락 없던 온라인 친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축복해 주셨어요.


축하에 끝내지 말고 책을 구매하는 것까지 이어지도록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도운 사람이 있는데요.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책을 사는 사람은 없는데 책을 쓰겠다는 사람은 너무 많아요.

참 아이러니하죠'라고요.


맞아요. 책 읽는 사람은 없어요.

근데 책을 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 쓰기까지 이어지는 거 같아요.


저 또한 그랬으니 말이죠.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 자신을 브랜딩 하기란

정말 어려워요.


집에서 솥뚜껑만 운전하다 보면 시야가 많이 좁아져 있고

온통 가족뿐인 일상으로 살아가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저에게 남은 건 가족뿐이었거든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면 그 사랑이 그대로

나에게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요. 이 길이 과연 나를 위한 길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독서를 하면서 길을 찾았습니다.

거기에 글까지 쓰다 보니 길이 보이는 거예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싱글맘이 되지 않았다면,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유지하며 내 길을 찾았다면

더없이 정상적이겠지만, 저는 저의 길이 따로 있었어요.


그 길을 찾기까지 첫 이혼 후 8년이 걸렸고요.

재혼하면서 문득문득 '어딘가에 내가 원하는 길이 있을 텐데.

그 길이 뭔지 모르겠어. 찾아야 해. 찾지 않으면 죽음 목숨이야'라는

절실함이 있었어요.


나를 브랜딩 하려면 굴곡진 삶을 고스란히 수면 위로 올려야만 했어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수면 위로 올리지 않고서는

내 인생을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살아온 길이 연속되니 말이죠.

숨기고만 싶었던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나의 경력은 학교 경력이 아닌 사회 경력이 아닌

이혼과 병마의 경력이 내 곁에 있었어요.


경력이 별거 있나요?

내가 살아온 과정이 경력이 되는 것이고

브랜딩 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2018년 여니가 두 살이 되는 그 해 갑자기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마음의 소리, 내면의 소리가 제 귓가에 맴맴 돌았어요.

이 부분은 책에 담겨 있어요.

궁금하면 책 사 보기.

내면 소리를 따라가자니 몸이 허락하지 않을 거 같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죄를 짓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마흔 하고도 두 살이 되던 시점이 운의 변곡점이 되었다는 걸

지나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마흔에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간절함이 보였던 2018년.


마흔이 되고서야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서른에는 몸으로 뛰면 살아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결과는 좌절이었고 실패로 돌아왔죠.


실패를 처음 맛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나타난 사람이 재혼할 남자였습니다.

재혼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사람이

수면 위로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도망 다니며 숨어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내가 살아온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상처와 병마, 그리고 결혼에 실패한 무능력한 엄마이자 여자만 남았죠.


2019년 다행히 몸은 건강했어요.

투병을 하고 있었지만, 정상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죠.

복통, 설사, 혈변은 간혹 보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할 상황은 아니었어요.


멀쩡한 손과 다리가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던 거 같아요.

현실을 이겨내고 나를 위해 살아보자는 자신감이요.


사실 이때 부정보단 긍정이 최고의 처방이었습니다.

뭐라도 해봐야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잘하는 일인지 알 수 있었으니깐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김미경 강사가 한 말이

가슴과 머리에 새겨졌습니다.


"엄마가 멋지게 성공할 테니 아들아 지켜봐 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때는 티브이 보는 낙으로 살았어요.


내가 뭐를 할 줄 알겠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알뜰살뜰

모아 살아보자는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근데 김미경 강사님의 말을 듣는 순간 큰 공감이 왔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이혼을 하고 딸들을 위해 멋지게 성공하자고 다짐했어요.

아니 김미경 강사님처럼 멋진 강사가 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아요. 하지만 내면의 소리를 외면했죠.


왜냐고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여태 넌 기계처럼 돈만 벌다 주부가 되었잖아.

근데 네가 뭐를 할 줄 알아',

'강사, 강사 같은 소리 하지 마. 누가 너를 써주냐' 등

온갖 비난의 소리가 들렸어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들었던

'넌 할 줄 모르잖아. 넌 못해'등 다양한 부정적인

소리에 주눅이 들었던 저였어요.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너는 못한다. 너는 자신감이 없다'등 내면의

소리에 타협했던 것이지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마흔을 넘기고 여니가 태어나면서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았어요.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가 쳤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음뿐이야. 죽음을 맞이하고 싶니! 아니면

못하더라도 일어나서 죽자 살자 너를 위한 길을 갈래'라는 소용돌이가

여기저기 부딪혔죠


마흔을 넘기니 김미경 강사님이 하던 말이 떠올랐어요.

'그래 딸들을 위해 일어서자. 아픈 엄마보단 당당한 엄마가 더 나을 것이고

보지 못하는 딸들에게 당당한 엄마로 앞에 서자'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 딸들이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거 같았어요.


내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정말 불안했고 떨렸어요.

굳이 공개해야 할까?

누가 이 말을 믿어줄까?

긍정과 부정이 싸우는 가운데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남편이 하는 부정의 소리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새장 속에 저를 집어넣으려 했던

남편 곁을 벗어나 친정으로 오게 되었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학창 시절 겪지 못한 사춘기를

마흔이 되고서야 사춘기를 겪고 말았지요.

친정집에 있으면서 엄마와 티격태격하며

마흔 살의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착하고 말 잘 듣던 맏이의 변하는 모습에 엄마 역시

맏이를 잡아 놓으려고 했어요.


이 모든 과정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혼한 모든 부모에게 감히 제가

힘이 되어 주고 싶었어요.

아픈 사람을 제대로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힐링이 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집필했습니다.


이혼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아빠들을 색안경 끼고

쳐다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마다 가정에는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으니깐요.

오해 없이 보통 가정의 부모처럼 봐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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