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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곁에 있었을,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에게 쓰는 편지.


어쩌면 내 곁에 있었을 수도 있을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에게

언제부턴가 글을 써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의 이름 모를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햇살에 얼비친 눈동자의 따스한 갈색 빛에

눈이 멀어도 좋을 당신의 이름을.


한때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톨스토이의 답처럼 사랑을 찾아야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명확해 보이다가도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은

그것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 모호해지기 일쑤였습니다.


각자가 바라는 게 다르고

처음 설렘의 그 끝이 결국 권태라는 것을,

새로운 자극을 계속해서 원하는

인간의 동물적인 감각을

휘몰아치는 열병과 질투라는 감옥 속에서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고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경험에서 얻은 나름의 수확이라 생각하며

오랜 시간 당신의 이름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내 곁에 있었을 수도 있을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서로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을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가 당신을 더 찾았어야만 했을까요?


살아보니 삶이란 것은

끝도 없는 안개 자욱한 미로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가 않아요.

불안이란 것이 삶을 도구삼아

두 어깨를 자꾸만 무겁게 짓누릅니다.


물결치는 안개의 힘줄 사이로

제게 내미는 당신의 둠직한 손을 상상해 봅니다.

둠직한 당신의 손을 잡으면 그 어떤 불확실성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땐 말이죠.

그럴 땐 시간의 나이테가 아로새겨진

저의 두 손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어 이름 모를 한숨이 새어져 나오면

당신은 얼굴도 이름도 없이

안갯속으로 그대로 사라져 버립니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장미는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장미인데,

왜 우리는 누군가가 불러줘야만

태어났다고 느끼게 되는 거냐며 반박하는

백은선 시인의 문장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말이죠.


그리곤 어느 통속 가요의 가사처럼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노래를 부르고

혼자 길을 걸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괜찮다고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해맑은 척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찾지 않은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은

지금쯤 다른 누군가의 곁에서

삶을 이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 곁에 있었을 수도 있을

이름 모를 이름의 당신과의

술잔을 기울여 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와 가슴 어딘가에

칠흑같이 깊은 블랙홀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그 블랙홀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당신의 손을 비록 잡진 않았지만,

만약 잡았더라도 그 블랙홀은

우리 둘을 삼켜버렸을 거라고.


그러니 전 해맑은 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이름 모를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망각의 강이 블랙홀의 극한 외로움의 강을

휘덮어 저를 지배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어쩌면 내 곁에 있었을 수도 있을

이름 모를 당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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