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eongihnK
Sep 05. 2023
나는 초등교사를 그만두었다
3. 내가 살았던 바로 그 관사-2
관사 리모델링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거주자들은 리모델링 통보를 일주일 전에 받았다. 개인물건을 모두 방에서 빼고 리모델링 기간 동안에는 관사에 머무를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살다 오라는 것이다. 리모델링을 하는 취지는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일 텐데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갑자기 잡힌 일정이니 집을 비우라니. 만약 일반 월세방 주인이 이런 횡포를 부렸더라면 뉴스감이 되지 않았을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주변 마을 숙박업소를 모두 수소문해 짧게 살 수 있는 방을 알아봤지만 방이 없거나,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해 머무를 수 없거나, 터무니없이 비쌌다. 부동산 여기저기에 문의하니 월세가 싼 빈집이 하나 있었는데 구경해 보니 샤워실도 세면대도 없고 재래식 변소가 있는 정말 오래된 거의 폐가 같은 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청 신규교사 담당 장학사가 신규교사들에게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 자리가 생겼다. 나는 '리모델링이 갑자기 진행되는 바람에 살 곳이 없다, 이런 시골 마을에는 쉽게 살 집을 구할 수도 없고, 계획에 없던 일정이라 가지고 있는 짐을 어디에 보관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게다가 그 어떤 지원금도 없고 차라리 이럴 바에는 리모델링을 안 하거나 간소하게 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장학사는 그런 일이 다 있냐며,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답변해 주며 걱정해 주셨다. 그러나 며칠 후 돌아오는 것은 교장선생님의 꾸짖음이었다.
'학교 내부의 사정을 함부로 허가 없이 외부에 말하지 마시오.'
나는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우리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해 주신 과학보조 선생님께서 선뜻 자기 집 거실에서 머무르도록 해주었고, 소정의 월세를 지불하기로 했다. 관사에 살던 6명의 선생님들은 그 집의 작은 거실에서 2달을 합숙했다. 당연히 비좁고 불편했으나, 나름의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2달 정도의 리모델링으로 그나마 사람 사는 집에 가까워졌지만 화장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예산 부족으로 거기까지는 손대지 못하였다 했다. 그런데 하필 그해 겨울에는 꼽등이들이 많이 번식해서 나와 룸메이트를 괴롭혔다. 화장실의 벌어진 틈으로 밤새 꼽등이들이 들어와 화장실 바닥을 점령했는데 새벽에 화장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면 마치 바닥 전체가 춤을 추는 듯 보일 정도로 빼곡했다. 새까만 꼽등이들을 자세히 보면 징그러우니까 새벽 5시쯤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서 실눈을 뜨고, 손만 문틈새로 내밀어 살충제를 가득 뿌려놓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나 그 시체들을 물로 쓸어 모았다. 매일 반복적으로 하다가 어느 날 문득 궁금해서 마릿수를 대강 세어보니 매일 죽이는 숫자가 500마리쯤 되었다. 그 일은 겨울 내내 벌어졌고, 내가 죽인 꼽등이 개체만 수만 마리 될 것이라 추정된다.
침실도 안전지대가 못 되었는데 자는 중에도 이불 밖으로 나온 신체 부위를 계속 공격당해서 잠을 설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잡으려고 파리채를 들거나 손을 올리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을 공격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옆집은 그 정도는 아니라 한다. 아 왜 또 우리 집만...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일어나 주워 버리면 앉을 새가 없었으므로 파리채로 일단 때려잡기만 해 두고 자기 전에 빗자루로 쓸어버리곤 했는데 그 양은 매일 쓰레받기 한가득이었다. 처음에는 매우 징그럽고 역한 느낌이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감각도 점차 무뎌졌다. 그 외에도 그리마, 거미, 귀뚜라미, 노린재, 파리, 바퀴벌레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꼽등이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살충제는 금방 동이 났고, 계속해서 구매했다. 우리 몸에 살충제가 농축되어 축적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어느 날에는 꿈속에서도 벌레로 뒤덮인 방에서 그것들을 잡아야만 했다.
여름에 습도가 높았던 어느 날에는 방바닥에 세숫대야만큼 물이 고이기도 했다. 처음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룸메이트가 물을 쏟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결로현상이었고, 매일 그 물을 걸레로 흡수해 치우고 말리느라 퇴근 후 시간이 매우 고됐다.
이곳을 나가서 좀 더 집다운 곳에서 살아볼까도 고민했다. 나는 왜 이곳에 계속 살아야 하는가. 더 나은 방을 구해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당시 월급은 180 만원 정도였는데 풀옵션 원룸은 관리비 제외 88만 원이었고, 무옵션은 55만 원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굉장히 멀어서 걸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시골이라 그렇게 단거리로 운행하는 버스도, 택시도 없었다. 만약 그런 방에서 살았다면 나는 주말에 본가에 내려갈 교통비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모든 힘듦을 차치하고 이곳에 살아야 했다.
아직도 나는 그 시절의 벌레들이 간혹 꿈에 나온다. 우스갯소리지만 내가 살생을 너무 많이 해서(그 해에만 수만 마리의 벌레들을 죽여서) 나는 죽어서 극락을 못 가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관사는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한 후 곧바로 완전 폐지되었는데 사유는 너무 오래된 관사에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교육청이 공문을 내려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 관사에서 무려 2년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