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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Mar 31. 2020

이 죽일 놈의 러브 쿠션

과거의 사랑과 함께한 동거 생활

이 죽일 놈의 옛사랑


1년에 2번. 명절에 맞추어 고향인 부산, 부모님 댁을 방문한다. 부모님 댁 소파 위에 딸아이가 유독 좋아하는 캐릭터 쿠션이 있다. 어설픈 듯 유치한 남녀 한쌍의 캐릭터가 십자수로 새겨진 쿠션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듯 낡은 모습은 지울 수 없고, 실로 연결된 그림의 외곽은 꽤 헤져있다. 세월이 지나 너무 촌스럽고, 더 이상 쓸 것 같지 않은 쿠션이다. 쿠션에 포인트가 있는데, 아래쪽 앙증맞게 두 남녀의 이니셜로 보이는 영문과 하트가 새겨져 있다.  JW♥JH.  정체는 과거 여자 친구로부터 받았던 핸드메이드 십자수 쿠션이다. 대학시절 유행하던 십자수로 만든 소중한 선물이었다. 15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쿠션이 아직도 집에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늘 놀랍고 당황스럽다.


쿠션을 딸아이가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이미 쿠션을 정체를 아는 와이프는 매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본인에게 이 쿠션은 대체 뭐냐고 압박을 해댄다. 나는 퉁명 스런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탓을 돌린다.

" 어머니, 이건 좀 이제 버리세요. 이게 언제 적 거예요~ "

그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구수한 부산 사투리로 부엌에서 매번 말씀을 던지신다.

"세상에 옛사랑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노? 그걸 가지고 뭘 그래. 쓸만하니까 안 버리지 "

아마도 전생에 어머니는 실용주의 선비이셨을 테다. 물건 하나 사시면 20년은 거뜬히 쓰시는 어머니가 쿠션을 쉽게 버리실 것 같지 않다. 매년 정해진 당골 레퍼토리가 있다.  "이 밥통 몇 살인지 아나? 니보다 나이가 많다 " 아마 밥통이 먼저 세상을 떠나야 쿠션도 사라질 것 같다.


명절 때 내려갈 때마다 매번 쿠션, 아니 과거의 사랑과 물리적으로 마주한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과거의 사랑은 마음속에만 숨겨 놓아야 할 비밀스러운 추억인가 ' 물론 일부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겠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옛사랑이었지 않았나. 만남과 헤어짐 그것은 성인 남녀에게 당연한 인생의 과정이다.



와이프의 과거


와이프와 혼인을 약속하고, 부모님을 뵈러 가기 전 나에게 중대하게 말할 것이 있다고 했다. 결혼 준비 전 생뚱맞게 중대 발표라니..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고 고민했다.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기 시작한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겁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헤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한참을 울었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와이프를 달랫고, 속사정을 물었다. 떨리는 와이프의 입술에서 말 한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나 파혼했었어 "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뇌의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닌 현실이라고 되뇌며 덤덤히 듣고 있었다. 와이프는 결론부터 말을 뱉은 후, 조금은 진정이 됐는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말을 해달라고 나에게 청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달란 거지?'  아마도 파혼 경험이 있는 자신과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갈지, 헤어질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는 생각이 날 떠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삶의 이야기와 사연이 있다. 그것은 과거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괜찮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와이프에게 괜찮다고 그게 무슨 큰일이냐고 도닥여 주었다. 괜찮다고. 당신의 과거가 지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쿨하게 받아들였다. 다음날 예비 장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딸을 이해해줘서 고맙네" 인사를 받았다. 마치 드라마에서 나오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현대판 주홍글씨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상처마저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싶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파혼. 그것이 딱지가 될 수 있을까. 이혼. 그것이 현대판 주홍글씨가 될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지금 내 옆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스쳐 지나간 그 남성은 내 부인의 빛을 보지 못했고, 나는 빛나는 진주를 발견했음에 감사했다. 옛사랑인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당신들이 있어 나와 와이프, 그리고 딸아이가 여기 있을 수 있니까.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어져 가겠지만, 지난 우리의 과거 기억이 있기에 우리의 현재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과거의 행적을 숨겨야만 할까. 우린 그때 뜨거웠었고, 지금도 뜨겁다. 서로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사랑은 어둡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때의 상처와 이별의 경험이 있기에 지금 성숙한 성인으로 더 멋진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존중한다. 그렇기에 그녀와 나는 지금 이 세상 어떤 결속보다 강하다.  


부모님께서는 와이프의 스토리를 아직도 모르신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파혼을 걱정하실까 봐, 그리고 연상인 그녀가 보수적인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일부로 말씀드리지 않았다.  

"세상에 옛사랑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딧노? 그걸 가지고 뭘 그래.  "

어머니의 말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드리실 텐데, 부모님을 위한답시고 왜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까. 그만큼 와이프가 좋았으니까 그랬겠지 싶다. 지금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와이프, 딸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과거가 있기에 아름다운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추억과 함께 살아간다. 고향집 부모님이 나의 옛사랑과 함께 동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의 러브 쿠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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