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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의 고무신발

볏짚으로 신발을 닦던 손은, 밤이 되면 이야기를 켰다



어머니의 고무신발은 늘 현관 앞에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신고 나가셨고, 햇살 좋은 날이면 마치 신발도 쉬어야 한다는 듯 가지런히 벗어 두셨다. 그 신발은 늘 어머니의 발보다 조금 커 보였고, 늘 바삐 움직이다 잠시 멈춘 흔적처럼 보였다.


지금 그 고무신발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대신 흙을 담고, 작은 생명을 품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발은 이제 신발이 아니라, 어머니의 시간이 머무는 그릇이 되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바쁘게 사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할 일이 있었고, 해가 지기 전까지 마쳐야 할 일이 늘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하루는 늘 남을 위해 먼저 쓰였고,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게 삶이라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고무신발은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있었다.

비싸지 않았고, 화려하지 않았고, 오래 신어도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신발. 물에 젖어도 금세 말랐고, 흙이 묻어도 대수롭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그 신발을 신고 텃밭으로 나가셨고, 마을 일을 보러 다니셨고, 이웃의 부름에도 망설임 없이 나섰다.


신발이 더러워지면

볏짚을 뭉쳐서 부엌아궁이에서 까만 재를 묻혀

하얗게 닦아서 곱게 신곤 하셨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새 신발을 사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있는 것을 아껴 썼고, 닳아도 버리지 않았다. 더러워졌다고 해서 흉하게 두지 않았고, 정성 들여 닦아 다시 신으셨다. 그 손길에는 물건을 아끼는 마음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부엌아궁이의 까만 재는 어머니의 손에 묻어 신발을 닦아냈고,

신발은 다시 햇볕 아래에서 하얗게 말랐다.

그 모습은 어머니가 하루를 정리하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아무리 고단한 날이라도, 아무리 힘든 하루라도, 그대로 덮어 두지 않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던 사람.


그리고 저녁이 되면,

볏짚으로 신발을 깨끗이 닦던 바로 그 손으로

어머니는 호롱불을 켜셨다.


어두운 방 한쪽에서 불을 밝히고,

아이를 끌어당겨 팔베개를 해 주셨다.

나는 그 팔에 머리를 얹고 이야기를 들었다.


장화홍련, 콩쥐팥쥐,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하던 옛이야기들.

책장은 자주 넘겨졌고, 호롱불의 불빛은 숨을 쉬듯 흔들렸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늘 온기가 있었다.

무서운 장면에서는 조금 천천히 읽어 주셨고,

슬픈 대목에서는 잠시 말을 멈추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 손이 단지 신발을 닦는 손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닦고, 삶의 방향을 만들어 주는 손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셨고,

이야기와 친해지게 해 주셨다.

그 팔베개와 호롱불 아래에서

나는 글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의 내가 글을 쓰고,

기억을 기록하고,

사라진 풍경을 붙잡으려 애쓰는 이유도

어쩌면 그 밤들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볏짚으로 신발을 닦던 손,

호롱불을 켜던 손,

책장을 넘기며 아이의 머리를 감싸던 손.


그 손은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지만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지금도 나를 밀어 올린다.


그래서 이 고무신발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한 사람을 만들어 낸 출발점이다.


어머니는 지금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그리움은 아픔만은 아니다.

살아온 시간을 증명해 주는 따뜻한 흔적이고,

앞으로를 살아가게 하는 조용한 힘이다.


나는 오늘도 이 신발 앞에 잠시 멈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부른다.

아무 대답이 없어도,

이미 충분히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2025년 12월 17일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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