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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을 살아본 사람의 마지막 조언

사랑은 끝내 포기하면 안 되는 일


사랑은 끝내 포기하면 안 되는 일

무대의 공기는 조용했다. 오래 살아온 사람의 말은 늘 그렇다. 소리가 크지 않아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날, 나는 김형석 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꿈을 만드는 토크쇼’라는 이름의 자리였지만, 정작 그날의 이야기는 꿈보다는 삶의 결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결산은 뜻밖에도 사랑에서 멈췄다.


“백 년을 살아보니… 후회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청중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백 년을 산 사람이 ‘후회’를 말한다는 건, 우리가 아직 겪지 않은 시간을 대신 돌아봐 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왜 끝내 사랑을 말했을까


김형석 교수님의 철학은 늘 명료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오고, 인간은 혼자 완성되지 않으며, 삶의 품격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관계 맺었는가로 결정된다는 것.

젊은 시절의 그는 치열했다. 시대는 거칠었고, 인간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에 가까운 동행이었다. 동료가 곧 가족이었고, 사유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사랑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철학은 언제나 인간 중심이었고, 그 중심에는 늘 사랑이 놓여 있었다.


“혼자가 된 뒤, 사랑을 찾지 않았다”


그날 교수님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혼자가 된 뒤, 아흔이 넘어서 사랑을 찾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었으니… 언제 별이 될지 모르니, 사랑은 체념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분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보다 사랑을 깊이 사유해 온 사람이었기에, 그 체념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분은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백 년을 살아보니, 그게 가장 큰 후회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숭고한 일


교수님은 단호했다.


“인생에 사랑만큼 숭고한 일은 없습니다.”


그 말에는 조건이 없었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성공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사랑은 미뤄도 되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나이를 핑계로 사랑을 접는다. 이제 와서 무슨 사랑이냐고, 혼자가 편하다고, 익숙함이 더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 년을 살아본 사람은 말했다. 사랑을 포기한 선택이 가장 오래 남는 후회가 될 수 있다고.


후학들에게 남긴 단 하나의 문장


그날 교수님이 후학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금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지 마세요. 사랑을 찾아 나서세요.”


이 말은 연애를 권유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으라는 말도 아니었다. 관계를 회피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다시 마음을 열고, 다시 누군가를 삶 안으로 들이라는 요청이었다. 사랑은 젊음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백 년을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


백 년을 산다는 건 오래 숨 쉬는 일이 아니다. 백 번의 계절을 견디는 일도 아니다. 백 년을 산다는 건,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노년의 지혜란 체념의 언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라는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미룰 만큼 충분히 살았는가.




2025년 12월 23일

-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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