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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Jul 18. 2023

무임승차

남편이 죽어도 아파트는 못산다 해서 하는 수 없이 한국 시골마을에 5년을 꼬박 살았었다. 그곳에서 아이셋을 키웠고 그 와중에 출근도 1년 했다. 차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곳이라 운전은 진짜 징하게 했다. 임신해서 배가 나왔어도 울고 싸우는 애들을 뒤에 주렁주렁 달고 이를 악물고 운전을 했다.


시골마을에는 노인들로만 가득했다. 그것도 노인 중에 상노인. 평균 80살 이상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노인들만 떼거지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손주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할매들은 나를 "아가"라고 불렀고 할배들은 나를 "아지매"라고 불렀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이사온지 다음 해에 옆집 할배가 돌아가셨고, 그 다음 해에 반대쪽 옆집 할배, 조금 이따가 그 할배의 막내아들, 둘째아들, 이렇게 초상이 났다. 처음에는 죽음을 가까이서 본 것이 너무 놀라 어쩔줄 몰라 했는데 점점 익숙해졌다. 동네에 못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고, 못보던 사람들이 다니면 저 집도 초상 났는갑네, 동네할매들처럼 감정의 동요없이 그렇게 넘겼다.


그곳에서 저출산(저출생)이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져오는지 가슴 절절히 느꼈다. 내가 그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는데 동네 할매할배들 부탁이 끊이지 않았다. 차를 몰고 나갈때면 읍내까지 태워달라,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계란 사다 달라, 농산물을 팔아달라... 마을에 일년에 한두번씩 열리던 잔치도 사라졌다. 더이상 밥을 하고 차릴 젊은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마을에 이사갔던 첫해 정월 보름 잔치가 내가 목격한 처음이자 마지막 잔치였다.


우리가 평소에 이용하는 모든 서비스는 젊은 사람이 일을 해줘야 가능하다. 일이란게 뭐 대단한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택배 배달원, 마트 계산원, 버스 운전사, 면사무소 직원, 우체국 직원 같은 을 말한다. 결국 누군가가 아이를 낳아 키웠기 때문에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나는 세금을 내고, 충분한 돈을 냈으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자신만만할테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준다해도 그 일을 할 젊은 사람이 없다면?도시 사는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이 낳아주는 젊은이가 유입되는 곳에서만 살아서 상상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죽어나가기만 하는 시골에서는 아무리 따블에 따따블을 준다해도 콜택시를 올 젊은 운전사가 없다.


프랑스 이 곳도 파리를 제외하면 곳곳에 인력난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식당이 문을 닫고, 요양원은 노인들을 받을 수가 없다. 운좋게 요양원에 들어가도 기저귀는 하루에 한두번 갈아줄 정도로 최소한의 서비스만 제공을 한다.


왕년에 얼마나 잘나갔건간에 노인이 되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흰머리를 검은머리로 염색하고 임플란트 해서 새 이빨로 싹 간다고 해도 그건 껍데기일뿐 속은 늙었고 몸을 젊은 사람처럼 쓸 수 없다. 몸은 잔고장이 잦고 병원에 갈 일은 더 많아진다. 밥해먹기도 버겁고 운전도 버거워지는 때가 온다.  자식 도움을 받든 이 낳은 자식한테 돈을 주고 도움을 받든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30년 후가 궁금하다. 직장 면접 보러 갔을때 "둘째는 낳지 않는 조건"으로 겨우 취직시켜 주고, 식당이고 까페고 애들은 성가신 존재이니 "노키즈존"이라고 오지도 못하게 막아버리고, 애 셋을 데리고 나가면 "왜 그렇게 능력도 없으면서 피임도 할 줄 모르고 무식하게 애 셋을 낳았냐"고 물어보고 쳐다보던 사람들에게 닥칠 30년 후가 궁금하다. 이젠 나보다 젊은 사람이 없음을 알았을 때, 나를 위해 일해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서 침몰하던 타이타닉에서도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조시켰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모든 애엄마에게 빚을 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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