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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pr 11. 2023

7일의 우울 (6): 병원 투어

마이르포: 나의 PMS

나의 간헐적인 우울이 과연 pms 때문인지, 석 달을 지켜보고 나니 연말이 다가왔다. 새해가 되기 전에 무엇 하나라도 매조지하고 싶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정신과를 검색했다. 집 근처에 정신과 다섯 군데가 떴다. 걸어서 갈 만한 곳이 없었으므로 주차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는 곳을 골랐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M정신과에 진료 예약 전화를 했다. 진료 예약은 불가능하고, 초진일 경우 오후 3시 이전에 방문해야 한단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예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큰 걸림돌이었다. 예약이 된다는 다른 정신과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하필이면 휴가 기간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조퇴를 내고 2시쯤 학교를 나와 M정신과에 무작정 방문했다. 나름대로 오후 진료를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대기자가 많았다. 세세하고 정성스런 면담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검사지부터 내미는데는 솔직히 당황했다. 생리전 증후군 때문에 찾아왔다고, 조심스럽게 데스크의 간호사에게 증상을 말했지만 그녀들은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별 소용이 없었다. 검사지는 나의 7일과 21일의 차이에 대해 무신경했다. 어차피 7일의 증상 때문에 병원에 찾아온 것이었으므로 일단 7일의 증상대로 빠르게 체크해나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진료를 보고 싶어 빠르게 체크한 것이 무색하도록 대기시간은 길었다. 계속 이렇게 기다리다간 아이의 유치원 하원 시간도 못 맞출 것 같아 걱정이 슬슬 되려 할 무렵 이름이 불렸다. 




의사 선생님은 전형적인 사업가 스타일이었다. 이 병원은 중증 정신과 질환을 다루지 않으며 상담 센터와 병행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잘 나가는 병원의 잘 나가는 의사 선생님의 자랑을 듣지 않아도 이렇게 긴 대기 시간동안 기다렸으니 잘 나간다는 걸 잘 알 것 같지만 나는 열심히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의 증상은 의사와의 면담이 아닌 검사지를 통해 판명되었으며 중도 이상의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데스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pms얘기를 꺼냈지만 의사 선생님은 간호사 선생님들 이상으로 반응이 없었다. 분노와 우울 지수가 높은 중도 이상의 우울증. 6개월 이상의 약물 치료 필요. 초진이므로 오늘은 약 처방이 나가지 않으며 보호자(남편)를 데려와야 약 처방이 나감. 가족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으며 어린 자녀가 있으니 그 어린 자녀에게 치명적일 수 있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지극히 당연했고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고 남편을 데려와야 한다는 점은 큰 충격이었다. 다른 정신과를 가 볼 걸 그랬다고 잔뜩 후회하며, 예약도 되지 않지만 다음 주에 오겠다며 인사하고는 병원 문을 나섰다. 




아직 아이의 하원 시간까지는 1시간 남짓 남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지겹도록 구독해온 터라 이미 잘 알고 있는 유튜브를 다시 켰다. 너는 갱생의 여지가 있으며 약을 3개월은 먹어야 효과를 본다고 했던 친구와의 대화도 떠올렸다. 병원에서 30분 가까이 대기했던 덕분에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잠시 소파에 누웠으나, 이렇게 조퇴를 내고 아무 성과도 없이 시간을 썩히기 아까웠다. 다시 네이버 지도를 켜고 이번에는 산부인과를 검색했다. 급한대로 제일 가까운 근처 산부인과에 갔다. 분만을 하지 않는 병원이라 대기실은 단출했다. 곧바로 이름이 불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드렸으나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pms 때문에 피임약 처방은 나갈 수 없다고 단언했다. 35세 이상의 노령이라서 정기적인 피임약 복용이 혈전 등의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한다. 우울증 진단도 우울한데 나이가 많아서 더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정신과에 다녀온 것을 어떻게 아시고는 대증요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정말 많이 좋아진 사람들이 많다며 나를 정신과로 권했다. 이미 다녀왔다고 말했더니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반색하시는 것까지 보고 나를 정신과로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귀찮은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 사이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병원 근처 갓길에 차를 댄 덕분에 10분 내에 차를 빼지 않으면 벌금이 나온다고 구청 문자를 받았단다. 급히 결재를 하고 더 급하게 차를 향해 뛰어갔다. 숨이 찼다. 피로했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나는 pms처럼 뻗어 버렸다.



남편은 나의 항우울제 복용에 긍정적이었다. 시답잖은 심리테스트부터 심도있는 상담까지 대화를 통한 해결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반차를 냈고 나는 다시 조퇴를 냈다. 우리는 나란히 지난번에 들렀던 M정신과로 향했다. 지난번보다 사람이 더 많았고 대기 시간도 두 배나 길었다. 나와 남편은 진료를 마치고 1등으로 딸아이를 유치원에서 하원시킬 계획이었는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 대기하고 나서야 이름이 불렸다. 우리는 잘나가는 그 병원의 잘나가는 그 자랑을 또 묵묵히 들었다. 자주 눈을 깜빡이는 남편은 선생님으로부터 가벼운 틱 의심을 받았다. 어쨌든 하루 반 알, 1주일 분의 약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예약도 안 되는 병원에 남편의 반차까지 내가며 두 번이나 들러서 고작 반 알, 1주일 분이라니. 없던 분노가 생길 지경이었지만 다른 정신과에 또 초진 진료를 받고 이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정도까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정신과에 그야말로 처음 가 봤던 것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우울증 약을 꼬박꼬박 복용하는 것보다 정신과에 들러 처방약을 받는 것이 더 힘들었다. 진료 예약은 안 되느냐, 약만 처방받아 갈 순 없느냐, 이런저런 잔꾀 섞인 진상도 부려 봤으나 병원에서 처방약을 받는데 그런 편법이 먹힐 리가 없었다. 매주 조퇴를 내고 병원으로 향하는 마음도 무거웠거니와 한창 업무가 바쁜 연말에 계속 자리를 비우는 마음도 무거웠다. 그래도 매주 병원에 들러 성실히 약을 받아간 덕분에 처방약은 1주일 분에서 2주일 분으로, 3주일 분으로 꾸준히 늘려 나갔고 3개월이 되었을 때 드디어 한 달치 약을 받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pms 증상도 늘어난 처방약의 개수만큼 호전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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