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르포: 나의 PMS
아이가 잠들고 나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들고 유튜브를 켠다. 구독을 누를지언정 굳이 찾아서 시청하는 채널은 없고 알고리즘의 안내에 편안히 따를 뿐이다. 한동안 <슬기로운 의사생활> 쇼츠를 열심히 본 덕분인지 이 프로그램을 리뷰하고 있는 <우리동네 산부인과> 채널 영상이 알고리즘에 떴다. 보다 보니 재미있다. 이 채널의 <슬기로운 의사생활> 리뷰 전편을 시청했다. 이 채널의 다른 영상들도 시청했다. pms 관련 영상도 나왔다. 경구피임약을 처방해 먹거나, 세로토닌 무슨 억제제라는 우울증 관련 처방약을 먹는 방법이 등장했다. 종전에 내가 아렴풋이 알고 있던 프리페민정이나 술, 커피, 운동 같은 처방이 나오지 않아 신선했다. 이 채널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의사들 중 한 명은 미레나 시술을 받았단다. 한 명은 경구피임약을 복용 중이란다. 나는 경구피임약 복용 영상도 열심히 시청했다. 미레나 시술에 대한 영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유튜브 영상이 그렇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넘기는 일이 많으므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pms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경구피임약과 항우울제 처방은 신선했다. 교차 검증을 위해 유사한 다른 채널 영상도 시청했다.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의사생활> 리뷰를 하는 의학 채널이 알고리즘에 떴다. <닥터프렌즈>라는 채널로, 정신과 남자 의사 3명이 호스트로 등장했다. 이 채널의 <슬기로운 의사생활> 리뷰는 종전의 <우리동네 산부인과>의 그것보다 재미 없었다. 그러나 이 채널에서도 썸네일에 pms가 큼지막하게 박힌 동영상이 있었다. 교차검증은 성공적이었다. 이 채널에서는 경구피임약 얘기는 나오지 않았으나 항우울제 관련 얘기는 상세히 나오고 있었다. 항우울제 명칭 자체는 이전에 본 것과 거의 같았(던 것 같)고, 조금 더 흥미로운 이야기도 나왔다. pms를 겪는 여성들은 밖에서, 그러니까 직장에서는 별로 티를 내지 않는단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직장 생활 중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pms 자체를 잘 인지하고 있어서 그렇단다. 그러나 그녀들은 특히 가족이나 연인 등 가까운 사람에게 여지없이 pms로 인한 예민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닥터프렌즈>의 호스트들은 pms를 앓는 여자친구들 둔 남자들이나 남편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탄수화물이 풍부한 것, 달콤한 것을 먹이면 증상이 호전되며 이것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음식이 바로 떡볶이라는 것이다! 아닌 밤중에 스탠드 조명만 음침하게 켜놓고 혼자 이 영상을 시청하던 나는 무릎을 탁 치며 깔깔 웃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여자들이 그렇게 떡볶이를 좋아했던 거구나! 3년 전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했던 남자 선생님 왈, 남자들은 떡볶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떡볶이와 어울리는 술이 없기 때문이라던 이유가 생각나서 더 크게 웃었다. 그래, 남자들에게 술이 있다면 여자들에겐 역시 떡볶이다. 탄수화물과 달콤함과 매콤함이 제대로 버무러진 그 음식은 어쩌면 pms를 치료하기에 가장 적절한 치료제였다. 하얀 탄수화물, 속이 뻥 뚫리다 못해 구멍 뚫릴 것 같은 매콤함, 씹는 맛이라는 이름의 쫄깃함, 달콤함을 모두 갖춘 그 음식은 바로 pms가 가져오는 우울함, 분노, 무기력함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였다.
잠시 떡볶이에 한눈을 팔았으나 어쨌든 <닥터프렌즈> 채널이 제안하는 pms 치료제는 항우울제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pms기간에만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복용해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정밀한 교차 검증을 위해 이번에는 'pms 처방'이라는 검색어를 넣어 몇 가지 영상을 더 시청했다.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였다. 항우울제는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야 복용할 수 있는 약이었으므로 이제 정신과 진료만 다녀오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사리 정신과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주변에 pms를 가볍든 무겁든 겪고 있는 지인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복용 중인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정신과 진료 자체에 낡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높은 진입장벽을 극복하고자 유튜브 영상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래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나는 오프라인으로 반응을 살폈다. 비록 정신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의사 친구와 만났다.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역시 쿨한 우리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네가 갱생의 여지가 있다는 거야"라고 나의 무거운 몸뚱이를 아낌없이 정신과 문턱 앞까지 밀어 주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또 다른 친구는 본인의 친구가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있는데 그 효과가 아주 괜찮았다며, 그러나 항우울제에 너무 의존하게 되는 것이 두러워 간간히 약 복용을 중단하고 있다며 나의 무거운 어깨를 한결 가볍고도 무겁게 해 주었다. (그녀의 친구는 pms가 아니라 육아와 살림 우울증 때문에 항우울제 복용 중이었다.)
아직도 무거운 엉덩이를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나의 변덕은 <금쪽같은 내새끼> 프로그램과 3개월에 걸친 자기 관찰로 종료되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도 건너건너 들은 나의 한 다리 건너 지인처럼 극심한 육아와 살림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항우울제를 복용 중인 장면이 등장한다. 항우울제를 그만 먹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냐고 그녀를 타이르는 시어머니를 향해 오은영 박사는 본인이 바로 정신과 의사이며, 항우울제는 복용자나 지인들 마음대로 복용을 했다가 중단하는 그런 약이 아니고, 항우울제 또한 질병의 치료를 위해 의사의 처방대로 먹어야 하는 약임을 분명히 상기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항생제를 먹일 때 잡스러운 내성이 생기지 않도록, 증상이 다 낫더라도 정해진 기간 만큼 끝까지 먹여야 한다는 복용 방법이 떠오르는 발언이었으며, 정신과 방문 앞에 마지막으로 놓여 있던 장벽을 비로소 깨부수는 발언이었다. 이제는 정신과에 가야할 것 같긴 한데, 내가 겪고 있는 이 짜증과 우울함이 정말 pms가 맞나? 나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나의 정신과 방문을 망설이고 있었다. 각종 검증을 마쳤으니 마지막으로 자기 검증을 할 차례였다. 매달 극심한 짜증과 우울함이 몰려올 때면 지금이 pms기간이 맞는지 생리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관찰은 석 달간 지속되었고 마침내 나는 이 짜증과 우울함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나는 유튜브를 검색하던 스마트폰을 켜 이번에는 네이버 지도를 켜고 우리집 근처의 정신과를 검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