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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pr 18. 2023

7일의 우울 (7): 항우울제가 준 잔잔한 일상

마이르포: 나의 PMS

딸아이와 둘이 저녁을 먹고 학습지 풀기를 마치면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 나는 빨래를 개고 딸아이는 자기 방에서 뭘 하고 노는진 알 수 없지만 뭘 하면서 논다. 약속한 30분이 지나면 나는 아이를 부른다. 우리는 아일랜드 앞에 나란히 서서 각자 하얗고 동그란 약을 한 알씩 물과 함께 먹는다. 딸아이는 마그밀이라는 변비약, 나는 항우울제 한 알. 딸아이가 마그밀을 먹은지는 반년이 조금 지났고 내가 항우울제를 먹은지는 반년이 조금 되지 않았다. 마그말도 항우울제도 같은 시간에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물건을 이리저리 펼쳐놓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한 물건은 다 서랍 속에 넣어 두는 편이지만, 단출한 우리 집 아일랜드 위에 내가 아침마다 먹는 영양제 3종(프로폴리스, 밀크씨슬, 비타민C)과 저녁마다 먹는 항우울제 봉지, 딸아이가 아침 저녁으로 먹어야 하는 마그밀 한 통과 그녀의 원활한 약 복용을 도와주는 젤리 한 봉지가 담긴 쟁반만은 올려 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힘이 되고 있었다.




병원에서 처음 항우울제 처방이 나갈 때는 약의 성능과 부작용을 테스트하기 위해 반 알씩, 일주일 분만 받을 수 있었다. 플라시보 효과를 한껏 의식한 덕분인지 약의 효과도 부작용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났다. 두 번째 진료에서 좀 어떠냐는 의사 선생님의 당연한 질문에 별일 없었다는 간단하지만 당연한 답변을 드리고 이번에는 한 알씩, 일주일 분을 받아 왔다. 약을 먹은지 열흘쯤 지나서 효과가 조금씩 보이려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겨울방학과 pms와 그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딸아이-친정어머니와 5박6일간 서울 여행이 함께 찾아왔다. 남편과 대중교통 없이 아이와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온 적이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던 탓일까, 그래도 친정엄마가 3일동안 함께 머물려 아이를 잘 돌봐주신 덕분일까, 아이와의 여행이 나름대로 즐거웠던 덕분일까, 약발이 빨리 잘 든 덕분일까 pms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던 날 생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그렇게 2023년의 첫 pms를 가뿐히 넘길 수 있었다.



친구가 미리 예고했던 대로 약의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는 않을 터였다. 아직 약의 효과가 미미하다고 느껴졌을 딱 한 달 간의 겨울방학 동안 나는 매주 정신과에 들러 한 주치 약을 처방받아 왔다. 방학 중이라 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대기하는 것도 그렇게까지 어렵고 힘들지 않았다. 진료실에 들어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늘 별 일은 없으셨죠? 조금씩 효과가 올라올 겁니다. 약은 꾸준히 같은 시간에 드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양을 늘릴 필요는 없으시겠죠? 를 기본으로 조금씩 기출 변형을 한 질문을 하셨고 나는 늘 기출 변형도 없는 네. 네. 괜찮아요. 네. 를 반복하다 보니 2월의 짧은 개학이 찾아 왔다. 생리전 일주일은 이미 그 전에 나를 찾아와 있었으나 심리적으로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끝무렵이긴 했으나 아직 방학 중이었고 짜증이나 우울을 촉발할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조금 무겁다는 느낌은 있었으나 이것은 항우울제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영역일 것이다.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내가 언제 pms를 겪는지 생리 중인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전혀 아는 내색을 하지 않았고 이번 달도 마찬가지였다.



항우울제 복용 후 두 번의 pms 기간을 겪고 나서 드디어 약을 2주 치 처방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플라시보 효과의 장벽도 넘었고, 이미 수 개월째 꾸준히 마그밀을 먹고 있는 딸아이의 도움도 받은 덕분에 나는 1달 이상 약을 꾸준히 먹을 수 있었다. 먼저 효과를 본 것은 pms를 겪지 않은 21일의 일상에서였다.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참 일관적으로 집안 살림에 소질이 없었고 나는 질리지도 않고 그런 남편에게 분노했으나, 이제는 그런 일로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나와 딸아이보다 늦게 저녁을 먹는 남편에게 식사 후 주방을 정리해달라고 말했으나 그는 식기세척기를 돌리지 않았고, 잠시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화는 나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예민하고 성격이 급해 예전 같았으면 이 작은 일이 그동안 쌓인 감정의 물꼬가 되어 이삼일은 짜증과 분노와 우울과 냉전이 지속되었을 텐데, 그날 밤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감정들은 사르르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미 기억나지 않는 일상에서의 자잘한 짜증과 분노와 우울의 발생 빈도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 사건들이 발생해 그런 감정들이 생긴다고 해도 순간의 감정에 가까웠으며 짜증과 분노와 우울의 지속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은 항우울제 복용 이후 생긴 고무적인 변화였다. 당연히 항우울제 복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잠시 감정의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바로 잔잔해지는 바다와 같은 나날들이 늘어났다. 가장 지근거리에서 이 모습을 잘 관찰해온 남편은 요즘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며, 자신도 나의 이런 상태 덕분에 더욱 평온해졌다고 아직 나도 또렷이 인지하지 못한 항우울제 복용의 효과를 몸소 체험한 후기를 남겼다.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남편에게 화를 낼 일이 줄었다면, 딸아이에게는 거의 완벽한 엄마에 근접하게 되었다. 원래도 크게 입을 뗄 것이 없는 아이였다. 원래부터가 딸아이는 다른 엄마들이나 어른들이 얘는 정말 혼낼 일 없겠다, 손갈 일 없겠다는 말을 많이 들어도 바로 수긍할 수 있는 아이였다. 순한 아이를 키워 본 엄마들이 왜 나의 고충은 몰라주냐며 흔히 느끼는 그 분노도 주지 않던 아이였다. 다만 잠에 잘 들지 못하고 매사가 느려 종종 화나 짜증을 돋구던 아이였다. 예전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아이의 굼뜬 모습은 항우울제 복용 후 그저 아이다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이가 밥 먹는 게 느리면 나는 마지막 두어 숟가락은 직접 먹여 주며 밥을 먹는 걸 도와 주었다. 밥 먹는 시간은 여전히 한 시간 남짓이었으나 감정의 동요 없이 기다릴 수 있었다.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짜증을 내면 나는 굳이 도와주지 않고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거나 다른 집안일을 하며 아이가 스스로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식탁을 사인펜으로 더럽히면 조용히 물티슈나 매직블럭을 가져와 조심해 줘, 상냥하게 한 마디만 하고는 슥슥 지웠다. 학원에 가야 하는데 아이가 꾸물럭거리면 지각을 예상하며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학원에 가는 길에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킥보드를 끌어 주며 시간을 벌었다. 매사가 느긋하고 대답이 굼떠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그만이었다. 덕분에 새삼 한 두 번만 일러 주어도 바로 말귀를 잘 알아듣고 행동을 고치는 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르게 키우기 위해 훈육하거나 훈계할 일은 있어도, 아이가 감정적으로 아프게 우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맞이한 봄방학과 함께 일상이 완전히 차분해지고 감정이 잔잔해짐을 느끼며 나는 항우울제 복용 후 세 번째  pms와 공포의 3월 개학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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