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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pr 27. 2023

7일의 우울 (8) : pms는 여전하지만

마이르포: 나의 PMS

아이와 남편은 늘 하던대로 오늘을 산다. 아이는 여전히 매사가 굼뜨고 식사에 집중하지 못해 식탁에 한 시간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한다. 남편의 집안일은 언제나 10개 중 5개는 불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잔잔했던 21일 동안 아이와 남편의 일관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pms가 발현되는 7일은 다르다. 아이에게 답답하고 남편에게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1년 중 가장 힘든 시즌인 3월 개학을 앞두고 나는 pms를 한창 지나는 중임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생리 주간 어플리케이션을 쓰고 매일 다이어리에 체크리스트를 쓰고 하루하루를 점검하는 꼼꼼한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굳이 생리 알람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pms 발현은 배꼽시계 이상으로 정확했기 때문이다. 짜증과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나를 공격하기 시작해 어플리케이션을 확인하면 어김없이 생리를 이삼일 앞둔 시점이었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마음은 잔잔한 채 계속 편안히 유지되었으나 컨디션이 점차 떨어지자 비로소 지금이 pms 기간인가 의심을 품게 되었다. 두통이나 근육통이 있는 건 아니었다. 미묘하게 기초 체온이 올라 몸이 따뜻했다. 늘 먹던 대로 많이 먹긴 했지만 체중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늘어났다. 얼굴과 종아리가 퉁퉁 부었다. 행동이 빠릿하지 못하고 우리 아이 못지않게 굼떴다. 어플리케이션을 열어보니 맙소사, 생리 예정일은 정확히 개학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pms가 마음 뿐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pms를 겪을 때마다 마음의 부침을 심하게 겪었던 탓에 몸상태를 미처 점검하지 못한 탓도 있었고, 컨디션이 떨어져도 스트레스를 받아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탓도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컨디션이 한창 떨어진데다 내일이 개학이라 2~3일은 정신 없이 바쁠 듯하니 며칠만 집안일을 쉬엄쉬엄 하겠다고 했다. 생리는 개학 첫날에 시작되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이틀이 지나고 나니 주말이 찾아왔다. 나는 7일간 마음이 아닌 몸으로 찾아오는 pms와 생리의 시작과 개학을 차례대로 맞이하며 밥상을 차리는 대신 가족들을 데리고 외식을 했다. 당장 급한 집안일만 해치운 덕분에 집안이 엉망진창이었지만 말 그대로 흐린 눈을 하고 애써 무시했다. 아이가 놀아달라고 보채면 엄마가 지금은 피로해서 쉬고 싶으니 각자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달래며 과자를 주거나 텔레비전을 틀거나 제 아빠를 불렀다. 짜증과 우울함과 무기력함으로 점철되었던 이전의 pms 기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풍경을 연출한 과정과 그 결과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짜증스러워 일상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무기력하여 일상을 놓아버린 것도 아니었다. 비록 비슷한 장면이긴 했으나 잠시 게으르고 느린 일상을 살아간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품지 않았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남편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정신과에서 항우울제를 처방받을 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약의 역할이 절반, 생활 습관 개선이나 본인의 노력 등이 절반의 역할을 해야 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약이 아닌 나머지 것들을 개선하기 위해 심리 상담을 추천한다고도 하셨다. 나는 심리 상담을 받을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고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평소 읽던 책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덕분이었다. 심리와 관련된 책에서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여러 장르의 책들은 때로 나를 위로하고, 때로 나를 일으켜 세웠으며, 때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김승주의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김하나/황선우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강효진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살림>, 정혜윤의 <사생활의 천재들>과 같은 책들 덕분이었다. 그 중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책은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던  애니타 존스턴의 <먹을 때마다 나는 우울해진다>라는 책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이유 없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올 때 그것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억지로 자신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틀 속에 가두거나 몰아붙이지 말라는 것, 이것을 해내고 나면 온전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밀려오는 짜증과 우울함과 무기력함과 이로 인한 게으름과 폭식을 좀처럼 희석시키기 어려웠었다. 비로소 약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오는 이것들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나의 pms 증상이 마음뿐 아니라 몸의 컨디션도 떨어뜨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는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늘 계획적이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를 이런 합리와 이성의 틀 속에 가두지 않기로 했다. 미뤄둔 청소와 요리와 집안일은 생리가 시작되면 해치우리라 마음먹었다. 생리는 개학 후 첫 주말에 끝났다. 하루 종일 대청소를 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가족들과 나들이를 다녀왔다. 



항우울제 복용 후 나는 총 5번의 규칙적인 생리를 겪었다. 지난 달은 생리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아차렸을 정도로 아무 증상이 없었다. pms 발현이 생리 어플리케이션 알람과 다름 없었던 내가 생리 주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항우울제 복용 효과는 탁월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 달의 pms는 또 양상이 달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남편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하루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가, 하루는 뭐라도 열심히 해봐야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아닌지, 내면의 변덕이 죽끓는 듯했다. 아이와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는 것이 천만 다행 혹은 조금이라도 개선된 덕을 본 듯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 안 듣고 술과 커피를 계속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pms와 상관없이 짜증이 솟구치는 걸까? 항우울제는 잘 듣고 있는데 내가 너무 게으름을 피우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탓일까? 항우울제도 소용이 없었던 걸까? 재발한 pms에 동요하며 합리와 이성의 틀에서 분석해도 소용 없다. 이미 해결책은 알고 있다. 적절한 처방약의 복용, 그리고 감정이 휘몰아치고 컨디션이 저끝까지 떨어지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남편과 아이가 자러 들어간 빈 거실은 조용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어지러웠다. 당장 내일 아침 먹을 것도 없는 냉장고는 텅 비었다. 조금 남은 에너지로 장난감을 치우거나 빨래를 개거나 장이라도 볼 수 있었으나, 나는 필라테스를 다녀오는 것에 그 조그만 에너지를 다 썼다. 아깝지 않았고, 귓등으로 흘러 들었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운동을 하고 나니 우울감이 좀 가셨다. 적당히 힘든 운동은 익숙했고 상쾌했다. 생리 어플리케이션에서 내일이 생리 예정일이라는 알람이 울렸다. 이번 달도 이렇게 무사히 pms를 통과했다. 



나는 여전히 술과 커피를 마시지만 여전히 나의 삶을 도와 줄 책을 찾아 읽는 중이며 의사 선생님이 지시하셨던 절반의 역할 중 운동을 새로 시작하여 실천하고 있다. 항우울제 복용이라는 나머지 절반의 역할도 충실히 지키는 중이다. pms는 한 때 내 삶의 1/4을 형편없이 갉아먹던 불안요소였고 구멍이었으며 불치병이었고, 나는 그것과 열심히 싸웠다. 이겼다고도, 졌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싸움의 과정에서 나는 아이와 남편을 너그러이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과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의 틀에 나를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pms는 내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해 준 마중물이 되었다. 이 다음 달에, 혹은 그 다음 달에 다시 pms가 찾아올지라도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이제는 pms를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지나는 길을 익숙하게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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