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으로 꽃이 피는 봄이 왔건만 아직 우리 마음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분명 주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은 봄이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겨울의 잔해가 남아 있다. 여행하는 이라면 한동안 어디라도 가지 못하면 몸살이 난다. 올해라면 그 증상이 더 심할 것이다. 지금은 웅크리기보다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다음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다. 봄이니까.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를 한 군데라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지려 한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거기서 일어났던 즐거운 추억이 나를 휘감는다. 비록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어느새 제2의 고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언젠가 다시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 그곳 안부가 궁금해지고, 거기서 우연처럼 만난 사람이 생각난다면 당신은 그 동네 주민이 된 셈이다.
혹시 당신에게는 그런 동네가 있는가? 내게 베트남은 그런 동네이다. 그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가성비 좋은 맛집이 넘쳐나고 길을 나서면 인심 좋은 푸근한 사람들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은 라오스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동안 베트남의 다낭, 호이안, 하노이, 하롱베이, 사파, 무이네, 달랏을 다녀왔지만 나트랑은 또 다른 매력을 지닌 동네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않게 이런 멋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나트랑이 내게는 그랬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내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건 아마 처음 나트랑의 첫인상을 시작한 게 혼총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벽에 도착한 공항에서 혼총까지 가는 길은 어둠뿐이었다. 혼총은 나트랑에서도 비교적 북쪽에 속한다. 우리는 나트랑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낼 예정이기 때문에 혼총과 시내권을 나누어서 예약했다. 창문을 잠시 내리니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둠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앗아가는 대신 다른 감각을 발달시킨다.
밤이 사랑스러운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의 고요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글을 쓰기에도 좋은 게 밤이다. 하지만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저가항공의 경우, 나트랑 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이기 때문에 이때 느껴지는 시간의 이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손님이 많으면 1시간씩 입국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사전정보는 나트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행히 공항에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변을 보는 순간 내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바다에 있었고, 거기는 평화롭고 아늑했다. 세상의 모든 평화가 그 안에 있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가졌던 일말의 불안이나 걱정은 더 이상 없었다. 더군다나 패키지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두를 일도 없었다. 그냥 바다를 보면서 해변을 산책하거나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보는 일이 전부였지만 그걸로 만족했다. 그러면 어떤가. 항상 빡빡한 여행만 다니다 보면 여행이 어느 순간부터 즐겁지 않다. 다음 일정을 걱정하고 정해둔 코스를 순례해야 하는 순례자의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딱히 정해놓은 코스가 없다 보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가끔은 그럴 때도 필요하다. 다들 살아봐서 알겠지만 우리 삶이 어찌 자기 생각대로만 되던가?
혼총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나트랑의 가장 매력적인 장점은 누구라도 탐낼 만한 멋진 해변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것도 무려 7km나.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해변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누구라도 그 바다를 한 번 보면 흠뻑 빠져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해운대는 여기에 비하면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어마 무시한 해변, 그 해변에 눈을 두고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힘들고 지칠 때 위로받을 수 있도록,
늘상
세상과 이기기 위한 연습만 하다가
오늘은 잠시 지기로 한다
대신 내 마음이
좀 더 밝아지기로 했다
그래 오늘은
하늘, 니가 이겼다
- <나트랑에 부는 바람>
혼총에서 일단 눈에 뜨이는 곳은 혼총곶이다. 해변 끝에 위치한 혼총곶은 대형버스가 늘 정차하고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쉬운 편이다. 연꽃을 머금은 사원에서는 막간을 이용해서 연주자가 공연을 한다. 정해진 시간이 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숫자가 모이면 즉석 공연을 하는 식이다. 공연이 끝날 무렵이면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바로 해변으로 향하는 것이다. 해변으로 향하는 계단 끝에 혼총곶이라는 숨겨진 바위가 있다. 어느 나라이거나 이런 바위에는 빼놓지 않고 전설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가는 길에 멋진 사진을 남길 포인트가 있는 것은 덤이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혼총곶에 머물렀다. 그저 바다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아마 놀이동산에서 그렇게 있으라고 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는 그저 물끄러미 바다를 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무에 그리 바쁘다고 정신없이 앞만 보는 생을 살았다. 나에게도 혼총의 바다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눈부신 바다가 그렇게 속절없이 다가오면 방법이 없다. 그저 마음 한편을 내어주는 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나 역시 아내 곁에서 물끄러미 바다를 지켜보았다. 차고 넘치는 바다 이야기를 한 번에 다 가슴에 담아둘 수는 없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다행히도 바다는 매달리거나 안절부절못하는 법이 없다.
해가 비치고
바람이 불면 이 세상도
혼총이나 같을까
잠시
시간이 멈춰도 좋았다
거기서라면
오늘도 지친 세상과 씨름하다가
눈을 감으면
추억 어디쯤엔가 그리운 혼총이 있다
- <나트랑 혼총곶>
아내는 혼총 해변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아마 새벽 산책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새벽 혼총은 해변을 끼고 새벽 달리기를 하거나 요가와 명상을 하는 사람들로 제법 부산하다. 오후의 혼총 해변은 느긋함을 즐기려는 이들이 점령한 반면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새벽 혼총은 하루를 준비하는 이들로 채워진다. 사람이 무언가에 흠뻑 빠지면 감추려고 해도 티가 나는 법이다. 혼총의 해변가를 다녀온 후, 아내의 마음에는 나트랑 바다가 살았다.
예전부터 아내는 산을 좋아했다. 드러내 놓고 공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산보다 바다가 좋은 눈치였다. 그런 아내가 자신이 이렇게 바다를 좋아하는지 몰랐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할 정도이니 나트랑의 혼총 해변이 좋기는 좋았나 보다. 심지어 아내는 누구나 탐내는 프랑스 니스나 세계 3대 석양으로 유명한 코타키나발루를 갔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는 나트랑에서 자신만의 바다를 만났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