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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Sep 04. 2017

아임 낫 유어 우먼

다큐멘터리 아임 낫 유어 니그로




라울 펙 감독의 2017년 작품 <아임 낫 유어 니그로>를 영상자료원 디아스포라 영화제 앙코르 상영회에서 볼 수 있었다.


영상자료원의 설명글을 참조하자면,


미국 흑인의 역사는 미국 건국의 역사이자 디아스포라의 역사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가 메드가 에버스, 말콤 X, 마틴 루터 킹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라울 펙은 제임스 볼드윈의 미완성 작품 ‹리멤버 디스 하우스›에 영화적 생명을 불어넣어 다큐멘터리.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로 완성했다. 백인 중심의 역사 속에서 왜곡되어 온 흑인의 이미지를 폭로하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는 민권운동으로 뜨거웠던 1960년대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지만, 트럼프 시대를 맞이한 지금 여기의 관객들에게 현재 진행형의 질문을 던진다. 시대를 뛰어넘은 생명력이 숨 쉬는 제임스 볼드윈의 언어는 사무엘 L 잭슨의 내레이션으로 더욱 강렬한 힘을 얻었다.

*2017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후보작.



한 작가가 쓴 미완성 작품을 한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는 기획이 흥미로워서 보러 가게 되었다.


영화는 흑인 민권운동가 메드가 에버스, 말콤 X, 마틴 루터 킹의 생전 발언들을 편집해 그들 각각의 생각을 마치 토론회를 하는 것처럼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목표는 같지만 방법론이 달랐던 것인지 목표도 미묘하게 달랐던 것인지는 좀 더 공부를 해봐야 알 것 같다. 나는 그들 모두가 "흑인과 백인은 평등하다."는 전제를 미국 사회에 납득시키려고 하는 목표는 같았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영화가 한참 흘러가는 동안 난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권리가 2017년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토로하는 미국 사회에서의 고립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고립감과 비슷했다.


흑인들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백인들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 그들에게 동일시를 느꼈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스스로 자신은 백인들이 응징하는 '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여성들이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어린 시절 동일시를 느끼며 성장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 '희생자'의 자리나 영웅의 조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의 혼란과 유사하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


"모든 국민들은 자기 집과 아내 등등을 가질 수 있지만 흑인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정확한 워딩까지 떠오르지는 않는다... 기억력이여..)."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었다. 국민이 아내를 '가질' 수 있다고? 그럼 아내는 국민이 아닌가? 그의 말에서 아내는 집과 동일한 사물의 하나처럼 취급되었다. 그 시대가 그랬다, 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때는 여성이 '국민'의 트로피처럼 취급받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진정한 문제는 2017년 현재에도 여성은 의무를 다한(구체적으로 무슨무슨 의무를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여성들에게 밀리고 있다고, 여성들에게 패널티를 주라고 아우성인 학업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남성에게 트로피처럼 안겨져야 하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그 이후 이어진 백인의 풍족한 일상과 흑인에게 가해지는 '처형'을 대비시키는 장면에서는 전자를 고전영화 속 백인 여성이 감미롭게 사랑 노래를 부르는 장면 바로 다음에 '처형'당한 흑인들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 국민들을 분노하게 한 왕실 사치의 상징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하지만 진정으로

프랑스 국민들을 핍박한 건 오스트리아에서 온 외국인 왕비가 아니라 프랑스 왕가와 귀족, 성직자들이었다. 왜 여성은 이토록 '백치의 귀부인'과 '희생자'로 쉽게 규정지어지는 것일까?



흑인 민권운동은 "흑인은 백인과 평등한 인간이다."라 주장하며 그들의 '니그로'라는 멸칭 속에 가두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서 '여성'이라는 멸칭 속에 가두어진 여성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동등한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여성은 배경이며 때로는 남자들에게 응징당해야 하는 대상이며 때로는 남자들에게 구해져야 하지만 정작 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희생자로만 위치한다.



이 부분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들이라 분노는 금방 지나가고 흥미가 생겼다. 인간은 자신을 향한 압제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저지르는 비슷한 압제는 왜 알지 못하는 걸까?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지나가고 싶은 것일까? 정말 알지 못하는 건가?


나 또한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민들과 어린이들, 노인과 내가 사랑하며 함께 살았던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명들에게 내가 저항하고 있는 패턴들을 답습한다. 어째서 가장 공감할 수 있을만한, 핍박받고 있는 존재들조차 누군가에게는 압제자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일까? 결국에 이러한 포악한 행동들의 원동력은 이 다큐멘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근거 없는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 가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 것을 체득했지만 아직 평등을 체득하는 데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가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인간다움이라는 생각이 인류가 발명해낸 수많은 생각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만이 인종, 종교, 성별, 성적 지향 등 그 어떤 차이에도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할 원동력일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며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아임 낫 유어 니그로라고 외쳤고

나는 아임 낫 유어 우먼이라고 외치고 있다.

뉴스에서 언제나 여성은 여성이라고 표기되지만 대부분 남성은 따로 남성이라고 표기되지 않는다. 남성이 아닌 인간, 그게 여성인 것이다.

나는 여성이 아니라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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