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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서 축제 기획자로 한 달 살기 (9)

9. 이렇게 계속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by 이양고


1. 모처럼 진지해진 순간 (feat. 회의)




오늘의 회의는 대표님인 ‘왕바우’도 함께했다.


추석이 지나면 바로 축제 기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을 함께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머니플레이 진행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논의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문득 회사를 다닐 때가 생각났다.


우리 팀은 매주 목요일 오전마다 회의를 했었다.
그 시간엔 각자가 맡은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나 콘텐츠, 협업 결과 등을 공유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만큼이나 다른 팀원들도 바쁘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서로의 고충을 충분히 나누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늘 남았다.





반면, 여기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일을 하고,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자연스레

속마음도 많이 듣게 되고 고충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조용하지만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고 있었다.






오늘의 점심은 종로식당.

의령에서만 2대가 운영하고 있는,

70년 전통의 소고기국밥 맛집이라고 했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수육과 소고기국밥이었다.


평생 경상도에서 살아온 나는,
소고기뭇국은 늘 빨갛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지역의 소고기뭇국은 맑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게 참 신기했다. 소고기국밥은 말하자면
소고기뭇국에 밥을 말아낸 느낌이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 일행은 썸머를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 출신이라
자연스레 ‘우리의 소고기뭇국은 빨갛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천안 사람인 썸머가 함께 있었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일정이 있어 자리에 없던 게 조금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길에 본 장면.


셔츠에 벨트까지 단정하게 매고,
수동 재봉틀을 돌리며 옷을 수선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유난히 인상 깊었다.


백발이 되도록 ‘내 일’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오랫동안 해온 방식을 고수하며 나만의 길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수선 일을 하면서도 늘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한다는 것.

그 모든 게 참 멋져 보였다.


실례가 될 줄 알면서도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은 아주 오래된 문구점이었다.
예전에는 서점으로도 운영되었다고 해서,
안에는 오래된 책들이 가득했다.

운이 좋았다면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쯤은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머물 시간이 없어 문밖에서 잠시 기웃거리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밥을 먹었으면 그다음은?
당연히 커피를 마셔줘야지.


가배목림, 이터니티 등 개인 카페를 자주 갔지만,
오늘 우리가 방문한 곳은 대기업의 맛, ‘투썸’이었다.


다른 카페들도 커피 맛이 좋지만,
개인적으로 투썸 원두를 좋아하는 나는
오랜만에 마신 ‘대기업의 커피’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하늘이 새파랗게 빛나던 여름이 지나자,
이제는 하늘이 색을 잃고 구름은 뭉쳐 있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젠 어디에서나 가을이 느껴진다.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지고,

햇살이 조금 더 부드러워질 때마다
곧 추워질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연말의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내년의 나는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이 유난히 아쉽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최근 4년을 통틀어 가장 뜻깊은 경험을

마음껏 누리고 있으니까.






2. 베풀면서 살고 싶어라



사무실에 가기 전,
미리 주문해둔 물품을 찾기 위해 다이소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찾아야 할 물품이나 추가로 필요한 것들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나는 정해진 동선을 살짝 벗어나 고양이 간식 코너에 얼른 다녀왔다.


사람이 먹는 소시지보다 고양이 간식이 훨씬 인기가 많을 거라는 판단 아래서였다.


얼른 고양이 간식 두 개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 나는, 부리나케 차에 올라탔다.




다이소에서 수령해 온 물품들을 정리해보니 무게가 제법 나갔다.


이렇게 물품들이 하나씩 사무실에 쌓여갈 때마다 실제 축제의 현장은 어떤 모습일지 자꾸 상상하게 된다.


이런 축제에서 일을 해보는 건 처음이라
무엇을 해도 재미있고, 무엇을 해도 즐겁다.

하지만 막상 축제 당일에 일을 하게 되면 마냥 신나지만은 않겠지.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해본다는 것,
그리고 내 인생에 또 하나의 경험이 더해진다는 건 무척 뜻깊은 일이다.




처음부터 내가 담당했던 게임 설명서를 프린터로 뽑았다. 축제를 위한 준비가 하나씩 차근히 되어가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프린트된 게임 설명서를 확인하고,
디자이너인 썸머가 제작해둔 ‘리치’가 택배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잠시 여유를 가지던 중,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의령의 풍경이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


처음 의령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바깥이 훤히 보이는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벌써 2주 차에 접어든 지금은 다르다.

창문 밖이 훤히 보이니 누가 지나가는지도 알 수 있고,
누군가 지나가면 인사를 건네기에도 한결 쉽다.


의령에서 청춘으로 일한다는 것,
안이 훤히 보이는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것.
그건 어쩌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의령에 내려앉은 가을을 느껴볼까 싶어 밖으로 나왔는데, 길 건너편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신난 마음으로 가방에 챙겨둔 고양이 간식을 꺼내 들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간식 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인 고양이들을 세어보니,
어느새 여덟 마리가 되어 있었다.


부모로 보이는 고양이 두 마리와,
그들의 새끼로 보이는 작은 고양이들까지.


가까이 다가가면 언제든 도망칠 듯한 제스처를 보여서 멀찍이서 간식을 던져주었다.


처음엔 뭐가 날아온 건지 몰라 망설이던 고양이들이
이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하나둘씩 다가와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아주 나이가 든 뒤에도,

길짐승들과 이렇게 밥을 나누어 먹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내게 쥐어진 것들을

기꺼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오늘의 저녁은 치킨, 만둣국, 쏘야, 그리고 한치숙회!


애초에 이렇게 거창하게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곁들이다 보니
어느새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치킨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들—
그러니까 만둣국, 쏘야, 한치숙회는 모두 망고가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저녁을 먹는 동안 망고는
주방을 들락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망고는 우리의 요리사다.
요리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고, 힘도 좋아서 함께 있는 동안 고마운 일이 많고, 참 멋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영화를 보곤 했는데,

<어나더 그라운드>, <우드잡>에 이어 세 번째로 선택한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예전부터 고전 영화로 손꼽히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었는데,

함께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정원에게

뜻밖의 사랑으로 다가온 다림.

그 짧고도 아련한 사랑을 참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보고 나니 왜 고전이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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