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저 조금씩 진도가 나갔을 뿐인데
처음 의령에 왔을 때만 해도 리치리치 축제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청양을 다녀오니 어느덧 축제가 코 앞으로 불쑥 다가와있다.
여름이 저만치 멀어졌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느덧 가을이 깊어지고 있는 것처럼.
내가 없는 동안 망고와 썸머, 또치가 열심히 게임의 틀을 짜고
서류 작업까지 부지런히 마련해 두었다.
머니플레이는 라운드마다 10분씩 미니게임이 진행되는데,
그 미니게임을 위한 보드게임도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만 진도가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쉬고 돌아와 정리된 자료들을 보니
게임 기획이 이미 상당히 구체화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점심은 농가맛집이라는 '보리수'
걸어서 올만한 거리에 위치한 식당이었는데,
밖에서 보는 외관 인테리어가 멋있었다.
보리수에서는 정식을 비롯해 김밥, 비빔밥, 국수 등 다양한 메뉴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정식 다섯 개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정식에는 생선구이, 미역국, 잡채, 제육볶음 등 여러 반찬이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반찬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정식을 추천하고 싶다.
아침을 먹지 않고 공복에 먹어서인지
모든 반찬이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뭘 먹든 혼자 먹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무엇을 먹더라도 혼자보다는 함께가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음식이 조금 맛없더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창시절에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힘들거나 아플 때 결국 힘이 되는 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뿐이라는 걸 여실히 느낀다.
아마, 이게 어른이 되고 있다는 뜻이겠지.
점심을 먹고 난 뒤, 산 중턱에 올라 의령을 한눈에 내려다봤다.
사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망고가 의령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주었는데,
멀미에다 혈당 스파이크까지 맞은 나는
‘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밥을 먹고 난 뒤엔 '이터니티'라는 카페로 향했다.
의령은 보리수라는 식당도 그렇고, 이터니티라는 카페도 그렇고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도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곳이 많다.
이터니티 사장님은 80년대부터 커피 관련 일을 해오셨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커피가 유난히 맛있었다.
커피 한 잔에 깃든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로.
나는 의령에서 축제 기획자로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큰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활에 불만이 없는 건
아마도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노는 것처럼 일을 하고,
일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살아온 세상이 너무 달라서,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후루룩 흘러가 버린다.
사실 일이 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성과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환경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오랫동안 몸 담그는 게 아니라 잠깐 동안의 프로젝트성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쾌적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였지만
손님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속상했다.
평일이라 그런 걸까, 주말에는 좀 많겠지?
예전에는 그저 인테리어 예쁘다, 커피 맛있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수익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꼰대가 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어린애 같은데,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경험을 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오히려 쉬운 선택만 하게 된다고들 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꼰대 같아지진 말아야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내 입장에서 함부로 단정 짓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조금만 긴장을 풀면
불쑥 꼰대 같은 생각이 튀어나온다.
나이가 들수록,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무던한 노력이 필요할까.
우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성과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이상형은 어떤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장거리 연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맹이라고는 없는 취향 관련 질문들을 주고받았지만,
이성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법이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한참을 재밌게 떠들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우리가 주문해둔 택배가 한가득 도착해 있었다.
게임에 필요한 기획과 문서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소포장 작업을 포함한 단순 반복 업무뿐이었다.
쌓여 있는 박스들은
마치 그 단순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처럼 보였다.
한참 일을 하다가 방에 잠깐 다녀오는 길.
그토록 보고싶었던 고양이를 발견했다.
시골이라면 분명 고양이가 있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길거리를 늘 살피며 걸었는데 2주차가 되어서야 마주치다니.
반가운 가득 담아 고양아! 하고 불렀는데
도도한 고양이는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갔다.
이 파우치는 머니플레이에서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이 받아가는 보상이다.
흰색 파우치 안에는 5만 리치와 젤리, 물티슈를 넣어주기로 했는데,
그중에서도 5만 리치를 하나씩 넣는 작업이 필요했다.
망고와 또치는 못다 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 나는 소파에 앉아 3천 개에 달하는 파우치를 하나씩 열어
5만 리치를 담기 시작했다.
우리의 배경음악은 '춘천가는 기차'
청양에서는 데이먼스이어, 검정치마 같은 노래가 자주 언급되었는데,
의령에서는 7080 노래나 2010년대 노래가 노동요처럼 자주 흘러나왔다.
청양에서는 열심히 트레킹을 마친 뒤 듣는 노래였으니 잔잔한 음악이 잘 어울렸을 테고,
의령에서는 열을 올려 일을 해야 했으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공간에 따라 노래가 달라지고, 노래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오늘 우리의 저녁은 고기.
내내 앉아서 일을 하느라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막상 고기를 먹기 시작하니까 술술 들어갔다.
한국인의 후식이라는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저녁이 끝이 났다.
회사를 다닐 때는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곤 했는데,
여기서는 일을 마치고 함께 맛있는 걸 먹는 게
하루의 자연스러운 마무리다 보니
건강한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그래도 살이 찐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저 즐겁기만 하니,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숙소 가는 길에 만난 노란 고양이.
사각사각 하우스에 소시지를 사둔 게 있어
그걸 가지고 나와 나눠먹었는데 맛있게 먹어주었다.
잘 먹는 것 같아서 “하나 더 줄까?” 싶어
소시지를 들고 다시 나갔는데,
아까 봤던 고양이가 아닌 다른 고양이가 와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새 소시지 맛집이라는 소문이라도 들은 걸까.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가지고 나온 소시지를 건네주었다.
겁이 많은지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지만,
멀찍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잠시 ‘이렇게 간식을 주면 나를 기다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쳤지만,
알고 보니 마을 어른들이 밥을 챙겨주고 계셨다.
청양에서도 그렇고, 의령에서도 그렇고—
길냥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