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비오면 비오는 대로
오늘도 조식으로 시작하는 아침.
가지무침과 콩나물 무침, 오뎅볶음, 김치, 소고기뭇국
건강한 집밥으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어 기쁘다.
한달살이가 끝나면 조식을 먹었던 기억이 생각나 아쉬울지도 모를 만큼.
오늘 비소식이 있어서
우산을 챙기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준비가 무색할 만큼 날씨가 화창하다.
(그리고 이 말은 복선이 된다)
한달살기 멤버는 10명.
이 10명이 움직이는 방법은
희주님과 또 다른 인솔자 호균님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방법인데,
희주님이 운전하는 차는 최대 4명,
호균님이 운전하는 차는 최대 7명까지는 탈 수 있어서
이동할 때마다 탑승하는 차량이 랜덤이다.
오늘 내가 탑승한 차량은 희주님이 운전하는 차량.
아카이빙을 위한 인터뷰 때문에
조금 더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희주님이 운전하는 차를 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천 곳곳에 대한 소개와
왜 순천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 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도착한 선암사.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설명을 듣고는
얼른 올라가서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철 산에 오를 때는 벌레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차에 내리자마자 이름 모를 작은 벌레들이
얼굴로 달려들어 내가 챙겨간 모기 기피제를 팔과 목에 뿌렸더니 좀 나아졌다.
화창한 날.
어제보다는 좀 덜 더운 것 같아 다행이라며
멤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세환 대표님께서는 선암사의 역사나 미술 등에 대해
설명해주시고자 우리와 함께 선암사에 올랐는데,
알지 못하고 오르면 안 보이는 것들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힘차게 선암사로 오르기 시작!...
했으나 아침부터 불안불안하게 아프던
배가 몹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모대표님께서 해주시는 설명을 다 듣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는 습관이 있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일정이 있는 날은
꼭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무척 민망하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다른 멤버들은
모대표님과 함께 떠나고
옆방 친구만이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 친구는 남원에서 온 친구로,
이번 한달살이 멤버들 중 가장 어리다.
하지만 나이와는 별개로 속이 깊고 배려할 줄 알며,
무언가를 배우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귀를 열고 들을 줄 아는 태도가 멋지다.
순천 한달살이를 하며 보고 느낀 건
타인을 대할 때 마음을 열고 보면
그게 누가 됐든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대표님의 다양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게 됐지만
남원 친구와 호균님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우리만의 속도로 오르는 산길이 고요하고 청량해서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몹시 굵은 빗방울이었다.
호균님은 여분 우산을 챙겨온 터라
우산을 가져 오지 않은 멤버들에게 가져다 줘야 한다며
빗속을 뚫고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라 걷는 것도 어려웠는데
빠른 속도로 멀어진 걸 보니
책임감이 발에 붙어 등을 떠밀었던 모양이다.
소나기치곤 거칠게 빗방울이 쏟아졌고,
우리는 결국 선암사 오르는 걸 포기하고
차 체험을 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차 체험관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찌나 비가 쏟아지는지
모든 사람들의 운동화와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었고,
머리카락과 티셔츠, 가방도 대부분 젖어 축축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야생차체험관
실내로 들어오니 쾌적했다.
비를 맞고 온 우리를 위해 에어컨을 틀어주셔서
옷을 말리며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도'가 일본식 표현이며,
우리는 '다례'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또한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된 내용이었다.
아주 작은 잔에 따라 마시는 세작.
* 세작이란?
24절기중 곡우 이후에 딴 어리고 고운잎으로 만든 녹차, 양력으로 4월 20일∼5월 6일 사이에 채취한 어린 잎으로 만든 차를 이르는 말이다. 이 어린 잎이 마치 참새(雀)의 혀(舌)와 같다 하여 작설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남 하동군에서 만들어지고, 한때 홍차와 같은 발효차로 여겨졌으며, 전통적으로 약용으로 마셨다.
아주 어렸을 때 하동에 가서 녹차잎 따기 체험을 했었는데, 세작을 마시니 그때가 생각났다.
어렸을 땐 의미를 모르고 했던 활동들이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는데,
오늘 먹은 세작이 그랬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걸 보며
차를 마시고 있으니 기분이 편안했다.
녹차를 생각하면 쓰고 떫은 맛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건 60에서 70도 사이로 우러내야 하는 차의 특성을 알지 못하고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찻잎에 그대로 부어 오랫동안 우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통방식으로 우려 먹는 차는
고소한 맛부터 깊은 맛까지 느껴지는,
말 그대로 우아한 느낌의 맛이었다.
차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나니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한국의 미가 여실히 드러나는 한옥 앞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를 들고 찍어대느라 바빴는데,
그 중에 촬영 일을 했던 친구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이 보았는데
영상 일을 한 사람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리라 다짐했다.
우리가 나갈 때쯤 되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파란 하늘을 뽐내고 있었다.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비가 와서 선암사를 못 본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 덕에 맛있는 차를 먹을 수 있었고,
멋드러진 운무를 볼 수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 자체는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 그 상황을 마주하는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서기 전
아주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 분의 신발이 없어진 것.
알고 보니 남원 친구가 자신의 신발을 오해하고
앨빈 님의 신발을 바꿔신고 간 것이었다.
남원 친구가 눈이 나빠 생긴 에피소드였는데,
나란히 놓고 보니 생김새도 비슷하고
심지어 옷까지 톤이 비슷해서 커플 아니냐며
한바탕 웃으며 사진을 찍어두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아련한 추억의 일부일테니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하산하는 길.
문만 열면 멋진 자연 경관이 보이는 이 곳에서
하룻밤쯤 묵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다른 방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4주차에는 소중한 사람을 초대하기 미션이 있는데,
다들 그때를 대비해서 어디에서 묵을지, 무얼 하고
뭘 먹을지를 미리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초대하기로 마음 먹은 터라
동생들이 좋아하는 게 많은 곳으로 숙소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축축했던 옷이 반쯤 마른 채로 하산 하는 길.
찌르면 비가 쏟아질 것 같았던 먹구름은
한바탕 비를 쏟아내며 저만치 멀어져버렸고,
숨어있던 파란 하늘이 빼꼼 나와 우리를 마주해주었다.
비가 와도, 날이 맑아도 모두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점심을 먹기 위해 차에서 내렸는데
작고 마른 고양이 두 마리를 보았다.
사람 손길을 안 탄 모양인지
무서워하면서도 꼬리가 긴 걸 보니
영양상태가 좋은 채로 태어난 모양이었다.
선암사 아래에 있는 선암식당으로 도착했더니
맛깔나게 보이는 산채비빔밥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는 게
김밥, 비빔밥, 볶음밥인데
그 중 하나인 비빔밥을 먹을 수 있어 기뻤다.
비빔밥 뿐만 아니라 메밀전병과
도토리묵무침도 있었는데,
전라도 밥상스러운 정갈한 맛이라서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도토리묵을 워낙 좋아해서
집에서도 종종 먹곤 했는데
집에서 먹으면 이런 맛이 안 난다.
이유는 아직도 못 찾았다.
손맛이 비법인걸까.
밥을 먹으면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스몰토크를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카페를 함께 가는 건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운 일인데
일정이 끝난 후 함께 먹는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
그동안 이야기를 많이 못 나눠본 '앨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를 하고 싶었다던 앨빈은
내가 겪어보지 않은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낸 사람이었다.
베트남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
베트남어를 배우고
다양한 자격증까지 딴 사람.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아 보였는데
그 많은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노력 끝에 결실까지 맺는 사람처럼 보였다.
친구에게 다양한 사람이 많다고 얘길 했더니
"너 스스로 우물 속 개구리라고 생각하지 마" 하고 말해주었고,
"개구리라도 좋아, 내 삶을 더 사랑하기로 했어" 하고 대답했더니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너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난" 하고 말을 덧붙였다.
퇴사를 하고 처음 상주 캠프를 갔을 때,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 온 사람들이 많아
그들에게 주눅 아닌 주눅이 들어 힘들다고 했던 것을
친구가 기억하고 위로 차원에서 말해준 것이었다.
혹 내가 다시 한번 속상할까봐 다정한 위로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헤매는 것 같아도 나는 지금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구나,
그때로부터 나는 또 다시 한뼘 성장했구나,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젖은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1층에서 의자를 구해 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달살기 이후 하루 두 시간 이상 글쓰기에 꼬박 투자하고 있는데,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느낀 것이 많고 쓸 것이 많기 때문이다.
18시가 넘어가자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근처에 '풍미통닭'이라는 맛집이 있는데
아직 한 번도 가보질 못해 함께 갈 사람들을 모았고
그 결과 룸메 둘과 저녁 약속이 없는 두 명이 가겠다고 의견을 전해왔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있는 '풍미통닭'
혹시 문을 안 연 건 아닐까 (김밥집 트라우마) 조바심에 전화를 걸었더니
자리를 치워야 하지만 빈자리는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올려다 본 하늘에
먹구름과 흰구름이 조화롭게 섞여있어서 마치 그래픽 같다고 생각했다.
풍미통닭은 통닭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맥주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들은 맥주러버가 없어서
가장 만만한 생맥만 한잔씩 시켜서 간단하게 곁들였다.
빈자리는 있었지만
다섯명이 앉을 자리는 부족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셔서 테이블링에 등록했고, 대기 공간으로 꾸며둔 옆 가게에서 쾌적하게 기다리다가 알림이 떠서 치킨을 먹으러 향했다.
다양한 tv 프로그램에도 소개되고 유명인들도 많이 왔다갔다던데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됐다.
양배추 샐러드에 올라가있는 소스를 보고 생각했다.
합격.
저 노란색은
간마늘에 참기름, 소금, 깨소금이 올라간 소스였는데
닭가슴살 같이 살이 많아서 퍽퍽할 수 있는 부위와 먹으면 퍽퍽하지 않고 감칠맛이 돌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치킨이 나오기 전 나온 생맥주.
심지어 한 명은 몸에 알코올이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하여 네 사람만 한잔씩 시켜먹었다.
다섯사람이 방문한 거라 세트 메뉴 중에
'풍미가족'을 시켜먹었는데,
후라이드 통닭, 마늘통닭, 주먹밥이 나오는 메뉴였다.
일행이 동그랗게 주먹밥을 만들어줘서
감사한 마음으로 쏙쏙 골라먹었다.
마늘통닭이 맛있었지만 가게 자리가 협소해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앉긴 불편했다.
우린 어차피 술이 목적이 아니라
저녁을 먹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얼른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쾌적한 공간에서
여유롭게 먹었다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하는 마음에 아쉬웠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으니
차차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겠지.
치킨에 맥주까지 먹었으니 걸어주는 것이 인지상정.
순천은 밤에도 조명을 켜두어 운동하는 것이 편했다.
진주에 살 땐 남강을 따라 걷거나 뛰는 게 일상이었는데, 순천 동천을 따라 걷고 있노라니 그때가 생각났다.
진주에 살았을 땐 학생 때라 늘 아르바이트로 시간이 촉박했고 돈 걱정에 삼김이나 컵밥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살았나 싶은데 돌이켜보니 생각없이 놀기도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날은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힘들었던 순간도 돌이켜보면 미화되곤 한다.
사실 미화가 됐다기보다는 오늘이 남은 날 중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걸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지나고 보면 모든 날이 청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깨달으니까.
한참을 걷고, 자전거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밤중에도 더워서 땀이 뚝뚝 떨어지던
한여름을 지나 이젠 저녁엔 살갗으로 선선함이 느껴질 정도다.
문득 바람에서 선선함을 느끼자
앞으로 남은 순천 한달살기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아쉬운 순간에 특히 더 빠르다.
그러니 멍하게 지내지 말고 1분, 1시간, 하루를 더 의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이렇게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