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B와 G는 내 첫 직장 선배였다.
일반 사무실에 근무했다면 직장 동료와의 교류의 폭이 넓었을 테지만
우리는 간부 공용비서실에서 미우나 고우나 셋이 갇혀 지내는 모양새였다.
점심은 교대로 먹으러 갔고
그러다보니 나와 B거나 나와 G, 혹은 B와 G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보스의 퇴근이 곧 나의 퇴근시간이라
우리는 퇴근시간이 따로 없었으며
그러므로 회식은 거의 기회가 없었다.
G는 상당히 독립적인 성향이라 소소한 마찰은 생기지 않았으나 다소 냉소적인 면이 있었고
B는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살짝 선을 넘을 때도 없지 않았다.
그 중 막내였던 나는 성격을 내 보일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리 적극적인 성향이 아니라서 혼자 마음상하고 혼자 풀고 했던 것 같다.
제일 나이가 많았던 G가 불같은 연애를 결혼으로 완결시키면서 먼저 퇴사를 했고
나이 순서를 거슬러 내가 재직기간 꼭 6년을 채우고 떠났으며
B는 이 후로도 10년을 더 다니다가 퇴직을 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줄곧 연락을 했었던 것도 아니고
전화번호 체계가 완전히 바뀌기도 했는데
어떻게 다시 연락이 닿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제일 먼저 결혼했던 G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고
이혼 후 이것저것 일을 하다가
보험설계사 일을 하게 되면서 연락이 닿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G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해서는
교육 받을 사람이 필요하니 하루만 나와 달라고 했다.
그게 때로는 일 년에 한 번일 때도 있고 몇 년 만일 때도 있었다.
약 7년 쯤 전에는 B와 함께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사실상 재직 기간 중 B와 조금 더 가깝게 지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에 달려 나갔다.
그 무렵 나는 사추기를 겪느라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언니들은 내 얘기를 들어주었고
해 줄 수 있는 위로를 생각해내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면서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G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는 중인데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다른 사람에게 과정을 공부하게 하는 8회에 걸친 실습이 필요하고
B가 같이 할 건데 너도 하면 좋을 거라고 했다.
언니들을 매주 만나는 것도 좋겠고 엉성한 신앙심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고 매 주 종로에 있는 카페에 모여 앉아 공부를 했다.
8회를 다 채웠을 때 이제는 너희들이 유치원과정 정도 마친 셈이니
다음 단계는 사는 지역에 있는 교육원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이사를 준비 중이었고
그러느라 다음 단계는 유야무야 중단이 되었다.
우연히 저녁뉴스에서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룹은 대부분 000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꼭 우리가 모였던 모습과 비슷해서 잠깐 고개를 갸우뚱 했었다.
B가 내가 사는 지역에 살다가 2년 전에 바로 옆 동네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은
오랜만에 전화를 한 G에게서 들었다.
반가움에 B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동산정보에 무지해서 서울 집 팔아 수도권 집을 샀다는 경로가
어떻게 둘이 그렇게 똑같냐며
건설회사에 다녔으면 뭐하냐며 둘이 전화기 붙잡고 깔깔거렸다.
전화로 한 시간 수다 떤 후에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하고는
며칠 후 중간지점 카페에서 만났다.
그 시절에는 날마다 이노무 회사 언제 그만 두냐며 징징거렸는데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며 향수에 젖기도 했고,
너 그 때 000씨 좋아하지 않았냐며 B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고
내가 좋아해서 언니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하는 동안
언니도 그 사람이 좋아졌다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화들짝 놀라며 내가 그랬었냐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며 B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낯익은 이름, 알 듯 말 듯한 이름,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고
누구와 누구의 사내연애 스토리, 누구의 대 결혼 사기극 등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소집하느라 저녁때가 된 줄도 몰랐다.
B가 밥하러 간다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면서
남은 얘기는 또 만나서 하자고 했다.
B를 다시 만났을 때는 G도 함께였다.
근처에서 돈가스로 점심을 먹으면서
내 20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라서인지 이 시간이 참 귀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커피점에서 슬러시와 커피를 사 들고 B의 집으로 갔다.
2천 년대 초반에 입주한 아파트인데 생각보다 구조와 상태가 좋았다.
그 아파트 주변 거리도 내가 사는 곳보다 한결 활기도 있고
교통도 편리한 것 같아서 내 관심은 온통 집과 주변 환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둘은 언뜻언뜻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급기야 B가 방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나왔다.
“네가 이미 눈치 챘을 거라서 아예 터놓고 말인데.....”
로 시작한 000 전교 테러를 나는 속수무책으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시계를 봐 가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말했다.
“나 그 얘기 듣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이제 언니들 못 보는 거야?”
말귀 못 알아먹는 불량학생 다그치듯 언니들의 목소리가 격앙되며
한꺼번에 섞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집에 와서 K와 마주 앉아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어떻게 그러냐, 나는 그래도 그 시간의 기억들을 오래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는, 그런 얘기를 뭐하러 듣고 있었냐고 했고
다른 친구는, 이제부터 손절이지 뭐. 라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일을 떠올리면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덩달아 내 20대의 기억까지 망가지는 기분이 들어 화가 났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 그냥 내가 호구였다고 생각하자.
이제부터 똑똑하게 살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