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차멀미를 심하게 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아지지 않았던 멀미에 대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친구와 설악산에 가는 버스를 탔을 때였다.
터널이 생기기 한참 전이었으니 설악산에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그 때 넘었던 고개가 한계령이었다.
가을이었고 한계령 단풍은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겠지만 오장은 뒤틀리고 입에는 계속 침이 고이면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빨리 버스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멀미에 있어서는 친구도 뒤지지 않아 일부러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도 그랬다.
얼굴이 허얘져서 버스에서 내린 후 그 여행에서 뭘 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앞좌석이 멀미를 덜 할거라는 말에 버스를 탈 때면 될수록 앞자리에 앉는다.
그것도 자주 하다보니 나중에는 선호하는 좌석이 생겼다.
맨 앞줄은 때로 까다로운 기사님을 만났을 경우 눈치가 보일 때가 있다.
두 번째 줄은 대부분 버스 바퀴자리라 발을 놓기가 불편하다.
세 번째가 좋기는 한데 그 자리는 창문 프레임이 시야를 가린다.
하여 최종 낙찰된 곳이 네 번째 좌석이다.
좌석 예약을 할 수 있는 고속이나 시외버스의 경우에는 네 번째 좌석에 앉는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는 여행동호회에서 버스로 답사를 갈 때 불거졌다.
세상에 차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출발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해 버스에 올랐는데 앞 좌석부터 버스의 중간 좌석까지 가방이며 옷가지등이 한 줄에 한 칸씩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멀미가 심해서 앞 좌석에 앉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답사를 하면서 한두 번 만난적이 있는 사람들이니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다고 말하기도 모호한 사람들이라 불평을 할 수도 없으니
원하는 좌석은커녕 맨 뒷줄 5인 석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과 외국 여행을 갔을 때는 처음부터 앞 쪽도 아니고 맨 뒤도 아닌 중간쯤 버스 뒷문앞에 자리를 잡고는 매일아침 집합시간보다 일찍 내려가 그 자리를 고수했었다.
그 자리가 엄청 좋아서라기 보다는 매번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는 유목민같은 모양이 싫어서 한 곳을 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행 오 일차쯤 됐을까?
평소였으면 출발 시간까지 차 밖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을 멤버들이 어쩐일로 차에 타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멤버중 한 사람이 우리가 앉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처음 버스에 올랐을 때 가방이며 옷가지들을 놓아 자리를 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띄엄띄엄 앉아 자리를 맡아 놓은 모양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으이구~ 여행하면서는 좀 떨어져 앉아보라고. 여러사람들하고 여행할 때는 다른 사람들하고 섞여 보기도 하는 거야. 부부라고 꼭 같이 앉으라는 법있어?”
하자 버스 안의 사람들이 다 같이 깔깔 웃었다.
그 동호회와 함께하는 여행은 그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펜데믹 덕분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K와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K가 먼저 올라 뒤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퀴자리인데다 저상버스라 다른 버스보다 더 높았다.
내가 그 옆이 아닌 통로 반대편 뒷 줄에 앉으니 그가 금세 따라와 앉았다.
“왜 굳이 그 자리에 앉았어?”
“그 자리가 좋아서.”
“엥? 바퀴자리라 불편하잖아.”
“으응~ 난 다리가 짧아서 그렇게 올라온 자리가 편하더라고.”
“헐... 그런 이유도 있었네?”
“당신은 다리가 길어서 불편하겠지만 봐봐, 내 다리는 바닥에 안 닿잖아.”
그래봐야 피클오이 키재기지만 K는 한사코 자기보다 내 다리가 길다고 말한다.
다리 긴(?) 나에게 맞춰 옆자리에 앉느라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불편을 감수한다는 얘기다.
K의 발이 공중에 뜨든말든 나는 바퀴자리에는 앉지 않는다.
부부가 꼭 나란히 앉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사람들과 하는 여행이라고 해서 부부가 꼭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다시 그 멤버들과 여행을 하게 된다면
굳건하게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K와 앉을 것이며
사람들의 말과 눈총에 신경쓰느라 어딜 갔는지 뭘 봤는지 뭘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 허무한 여행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거다.
만약, 만약에 그 사람들과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