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있었는 줄도 몰랐는데 K에게 버킷리스트가 있었다고 했다.
하나는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걸어서 국토 종단이라고 했다.
패러글라이딩의 꿈은 샌디에이고에 살 때 글라이더 포트에서 가지게 됐는데
그 때 못 한 것을 샌디에이고 대신 작년에 문경에서 아쉬운대로 이룬 셈이 됐다.
나머지 하나는 얼마전 다른 말 끝에 이미 포기한 것처럼 말해서 알았다.
TV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중이었다.
외국에서 온 청년들이 독도지킴이가 되어
‘울릉도 돈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두리(?)고향...’
을 외치며 울릉도로 해서 독도까지 다녀오는 중이었다.
K는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자칭 타칭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볼 수 있다는 독도를 이미 두 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한 번은 나와 함께 였고 나머지는 직장 동기들과 여행이었다.
K는 제주도보다 울릉도가 더 좋다고 했고
울릉도가 처음 갔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도 했으며
달라지는 모양이 부디 원래 모습을 해치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언제 한 번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어차피 국토 종단은 포기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짧게짧게 돌아봐야겠어.”
라고 했다.
차로 국내를 짧게짧게 여행할 거라는 말은 하도 여러번 들어서 놀라울 얘기는 아니었지만
은근슬쩍 끼워넣은 국토 종단 포기 선언은 조금 의외였다.
걷기를 좋아해서 보병이 된건지 보병이 되어서 걷기를 잘하게 된건지는 알 수 없지만
K는 걷기를 좋아하고 잘한다.
걷기로 다이어트를 했고 방송도 탔으며 여행도 했고 여가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십여년 쯤 전에 호기롭게 혼자 출발했던 국토종단길이 오산에서 중단되었을 때만해도 그의 의지는 더욱 굳게 타올랐을 뿐 포기를 예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산티아고길을 꼭 한 번 걷고싶다며 준비과정으로 올레길 완주에 도전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에 실제 국토종단 프로그램에 참가신청을 하고는 일정을 조율했다.
버킷리스트 얘기는 그 때 했던 것 같다.
패러글라이딩은 했으니 이제 걸어서 국토 종주할 기회라며 무척 기대에 차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과는 달리 주최측에서는 K의 나이를 감안한 건강상태를 부적격하게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탈락했다.
그 때였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계기가 있었을까?
K는 걸어서 이 땅의 남쪽 끝까지 가는 도전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운전해서 어느 지점까지 가면 자기는 걸어서 그 곳에서 만나면 좋은데, 라며 운전하지 않는 내 탓을 하기도 했다.
그 때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대체 그걸 왜 하려고 저러나.’ 했었다.
그런데 막상 포기했다고 하니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음은 오히려 착잡했다.
K를 여행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단정하고부터 더 이상 여행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올 초에 새로 찾은 일이 하루 중 한 가운데 시간을 차지하고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K의 말이 어쩐지 여행하지 않을 명분이 돼서 좋다는 말로 들렸다.
하여 봄에 일본 가족여행, 기차타고 부산에 다녀온 이후 여행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부산은 살아본 적도 있고 여행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가 알던 그 때 그 부산이 아니었다.
그 중 천지가 개벽을 한 것처럼 달라진 해운대에서 사흘을 지내는 동안
예전 추억을 곱씹어 보기보다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고, 다시는 이 곳에 숙소를 정하지는 않을 거라는 결심까지 하게 됐었다.
저녁 정보 프로그램에서는 날마다 풍경 좋은 지역을 소개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K는, 나 저기 가 봤다며 내가 거기 다 안다며 부연설명을 한다.
옆에서 듣다보면, 그가 안다는 그 곳은 짧게 잡아도 십 년 이상 전의 모습들이다.
우리는 경주에 생겼다는 황리단 길도 대구의 새로운 음식문화의 성지에도 순천에 엄청 큰 규모로 조성된 정원에도 가 본적이 없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못 가볼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 본적 있는 익숙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한정된 시간이니 될수록 많은 곳을 돌아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여행은 남들이 가서 소개해주는 TV프로그램만으로 충분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이 K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언제 저기 한 번 가볼까?”
라며 K가 TV에서 나온 장소를 급하게 받아 적는다.
동묘-서순라-익선동
언제 한 번 가지 뭐. 라고 말로 한 적은 있어도 메모까지 한 것은 처음이다.
내 눈에 생기가 돌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여행얘기는 안할거라 마음 먹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애처로운 고양이 표정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게 언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