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네? 아, 그런가요?”
의사는 뭐 그런 대답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마 나 역시 그런 질문도 있나? 싶은 표정이었을 것 같다.
생각해본적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당연한 것 같지만 내게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본인은 엄마를 엄청 좋아하는데 엄마는 그렇지 않아서 상처받으시는 거 아닐까요?”
“.......”
아니라고 하기에 일상에서 엄마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내 마음이 엄마라는 이름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내 엄마는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엄마는 강하고, 지혜로우며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엄마는 안 먹어도 저절로 배가 부르고
심지어 입에 든 것도 자식이 먹겠다고 하면 꺼내 먹이고
엄마는 자식이 해코지를 당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자식을 이기는 엄마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우리엄마는 강하고 지혜로웠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으므로 밥은 늘 한 밥상에서 같이 먹었다.
해서 자식들이 먹는 것을 보기만 해도 엄마배가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자 형제들의 경우는 모르지만 나는 살면서 들었던 가장 모진 말을 엄마에게서 들었다.
친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따돌림을, 나는 설거지를 하는데 엄마는 따뜻한 방 안에서 아들들하고 TV를 보면서 웃을 때 느꼈다.
TV에 나오는 수퍼우먼 엄마들은 어려운 살림 때문에 덩달아 고생한 자식, 특히 딸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하는데 엄마는 내게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네가 있어서 고생이 조금 덜 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집은 항상 네가 문제라고 했다. 너만 아니면 우리집에 무슨 걱정이 있겠냐고도 했다.
서른셋에 남편을 잃고 자식 셋을 키운 엄마는 훌륭한 엄마이지만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아들 둘 사이에 낀 딸로서는 그렇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가 저마다 아이 이름 후보를 정해놓고 있었다.
다행히도 시부모님이 돌림자를 고집하지 않았던 터라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의 범위가 넓었다.
최종적으로는 내가 ‘어진’이라고 지었다. 동시에 나와 K가 어진아비, 어진어미로 불렸다.
원래 어질지 않았어도 그렇게 불리니 어쩐지 자꾸 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둘째 이름은 오래 고민해서 더 좋은 이름으로 짓고 싶었다.
어쩌면 이 부분에 사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좋은 이름이 ‘좋은’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하지만 이미 큰아이 이름으로 거의 굳어진 터라 가족들에게서는 불려보지 못했던 이름을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좋은어머니’라고 불렀고 아이 친구 엄마는 ‘좋은엄마’라고 불렀다.
그 말이 듣기 좋아서 일부러 못들은 척, 다시 한번 부르게 한 적도 있었을 것 같다.
아이들은 자라서 이름처럼 어진이는 어진 어른이, 좋은이는 좋은 어른이 되었다.
내가 좋은 엄마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것을 바라본적은 없고 뭘 먹고 싶으냐는 말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에 집중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추기혼란 때문에 정작 아이들이 견뎌야 했을 힘든 시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성이 편하기 위해 만들어진 억지모성의 조건 중 그래도 하나는 일치한다.
아이들에게 이긴 적이 없다. 이기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으며
아예 맞서는 상황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몰랐지만 적어도 내 엄마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누가 뭐래도 좋은엄마지만
마음은 진심으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