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걸릴 뿐, 안 되는 건 아니네

by 이연숙



그래봐야 헤어드라이어의 한 종류인데 가격이 후덜덜하다 못해 사악하다 싶은 D사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것이 거의 일 년이 지났다. K에게 심통이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확 질러버려?’했다가 ‘에휴, 그러면 뭐하나. 나중에 카드청구서 보면 내가 왜그랬을까 할 거면서’ 라며 마음을 가다듬고는 했다.

쓰던 드라이어 출력이 워낙 약해서 바꾸고는 싶었지만 그렇다고 D제품을 살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원래 가격도 엄청난데 그 제품은 할인행사도 잘 안 하고 카드청구할인이나 포인트사용에서도 늘 제외였다.

몇 년 전부터 이미 사용하고 있는 K2가 그랬듯이 제품의 리뷰는 한결같이 호평 일색이었지만 내게는 그냥, 넘을 수 없는 벽 일 뿐이었다.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후에도 벌써 두어차례인가 가격이 올랐고 심지어 신제품은 거의 백만원에 가까웠다.

미쳤지 미쳤어, 저걸 사느니 제주도 여행을 한 번 더 갔다 오겠네, 라고 자기위로까지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욕실에 그 것이 떡 자리를 하고 있다.

명절 때면 아이들이 주는 용돈을 차마 쓰지 못하고 몇 년 째 봉투째 묵히고는 했다.

그런데 이 번에는 K가 자기 몫의 봉투를 내게 줬는데 못이기는체 받아들고 나니 제법 두둑하다.

그 순간, 아마도 그 분(?)이 오신 게 분명하다.

때마침 D제품 방송할인 알림이 왔고 로그인해서 결제까지 30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배송도 엄청 빨라 연휴 끝나기 무섭게 집 앞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의 일 년 가깝게 장바구니에 두고 간만 보던 그 물건은 모양이 드라이어와도 달랐고 고데기같지도 않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시대라서인지 사용설명서도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바람은, 나올거라 예상되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나왔고 환상의 컬을 완정해준다는 도구를 끼웠더니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펄펄 날릴 뿐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순식간에 비싼 고물덩어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새 제품일 때 당근을 하든가 해야겠다며 욕실 거울 아래 고이 모셔둔 채 한동안은 있던 드라이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가끔 한 번씩, 드라이어만 이용했다. 머리가 금방 마른다, 소음도 훨씬 줄었다.

그 다음엔 롤브러쉬와 비슷한 도구를 끼워서 사용해봤다. 그건 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 번 툴을 한 번씩 바꿔 사용해보다가 문제의 에어랩배럴이라는 도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니 방향전환 레버가 있었다. 천천히 머리카락에 대고 전원을 켜니, 오! 세상에 가래떡처럼 생긴 플라스틱 막대기에 머리카락이 저절로 감겨 컬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부스스한 머리를 의도한대로 손질이 가능해졌다.

지글지글 속을 끓인 기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이용할 줄 알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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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일본어 시간이 처음에는 무척 긴장이 됐다.

일본인 강사는 한국말을 할 줄 알지만 일본어로 강의를 한다.

어디가서 일본어 삼 년 공부했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을만큼 나는 단어도 문법도 제대로 갖춰진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예문을 써놓고 수강생 모두에게 돌아가며 읽으라거나 해석하라고 할 때에는 머리털이 쭈볏서기도 한다.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내 이름이 불렸을 때,

어랏!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내가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 목소리가 낯설다.

그 다음 시간에도 별로 막힘없이 읽었고 뜻을 해석했다.

그리고 이번주 수업시간에는 무려 일본어로 질문까지 했다.

그 반의 구성원들은 이미 그 이상의 수준일 것이므로 누구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내 스스로가 뿌듯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는 발걸음이 다 가벼웠다.

못하겠다고, 그만 둔다고, 이걸 해서 어디다 쓰겠냐고 징징거리면서 삼 년이 지났다.

그 삼 년이 결코 그냥 지나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오래 걸렸을 뿐,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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