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로부터 약정 요금 할인 갱신안내 문자가 왔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마냥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연결이 빨리 됐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문의내용을 말했고 속전속결로 처리가 됐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끊으려는데 상담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연결된 김에 기가 인터넷에 대해 상담을 받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끊으려는데 다시 그의 목소리가 붙잡는다.
“인터넷 TV 프로모션 중인데 연결된 김에 담당팀으로 연결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며 매정하게 끊는 중에도 저쪽에서는 가느다란 음성이 계속 흘러 나오는 것 같았다.
상담사와 통화 연결이 가끔은 기다리다 지쳐 분노를 자아내는 수준까지 될 때도 있으니
정말로 궁금한 점이나 원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연결된 김에 한 번에 해결하면 좋기는 하겠다.
얼마전 TV여행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은 여행지까지 가는 길에 경유지에서 환승 시간 사이
‘여기까지 온 김에’를 남발하며 계획에 없던 나라의 관광지로 택시까지 타고 가는가 하면 맛있는 집이 있다며 그 짧은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그 배우처럼 경유지에서까지 관광을 할 정도의 용기는 없지만 외출하는 날에 볼 일을 모두 모아서 한 번에 하는 편이라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원인불명(?)의 통증으로 침을 맞으러 무려 두 시간 거리 한의원에 다닌지 한 달 째다.
첫 두 주는 주 2회였고 다음부터는 1회였으니 사실상 여섯 번 남짓이다.
지난 주에는 K2와 통화를 하는 중 요즘 소화가 안 되고 자주 배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침을 맞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K2 집에서도 한의원까지는 멀다.
처음엔 그 먼데를 어떻게 가냐고 하더니 나중에는 한 번 가보겠다고 했다.
침술이 뛰어나다는 그 한의사를 언젠가부터 우리는 도사님이라고 부른다.
처음 그 곳에 간 것은 십 년 쯤 전, 어깨통증 때문이었다.
아픈 곳은 어깨인데 의사는 맥을 짚으며 긴장을 자주 하나보다고 했다.
특별히 엑스레이나 초음파에서 뼈나 인대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면 대부분 스트레스로 인한 근육 경직에서 통증을 유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냐며 웬만하면 좀 내려 놓고 살라고 했다.
침의 영향인지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아무튼 차츰 통증이 사라졌던 경험이 있었다.
이후로 늘 승모근이 단단하게 뭉쳐 어깨좀 주무르라는 말을 달고 사는 K를 데려갔고
손발이 차고 자주 체하는 K2를 데려간 적도 있었다.
어쩌다보니 내가 도사님 영업맨이 된 것 같았다.
가족들의 공통된 의견은 ‘그 사람 참 침은 잘 놓는다.’ 였다. 게다가 의원 이름에 ‘神’자가 들어가는데다 모르는 게 없고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듯 말하는 품이 어쩐지 거만하게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게 또 효과가 있으니 우리끼리는 존경 반, 재수없음 반의 의미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열 개 남짓한 침상이 위 아래가 뚫린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 다른 환자들에게 침을 놓으면서 하는 얘기들이 그대로 다 들린다.
여러번 가다보니 이제는 그가 하는 말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됐다.
비슷하다고 허풍이 아니고 사람 대부분 일정부분 스트레스 속에 살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환경인 경우가 많다는 편이 맞겠다.
K2가 침을 맞고 나서 조금 나아진 것 같다고 했다.
한의원에서 나와 보니 갈 때는 급하게 가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화사한 가을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지역이 우리 집보다 북쪽이라서 인지 아니면 공기가 더 맑아서인지 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단풍빛이 무척 선명했다. 가을이 그 곳에만 온 것 같았다.
그 곳에 살 때 가끔 가던 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길눈은 어둡지만 무작정 호수공원쪽을 향해 걸었다. 걷다보니 정작 그 곳에 살 때는 가 본 적 없던 전원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전날 비가와서인지 하늘 빛은 맑았고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중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묵혔던 얘기들을 나누고 스타벅스 밀크티를 사서 호수공원 그네에 앉아 또 긴 긴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지간히 나아져서 치료를 끝냈고 어제는 K2의 두 번째 예약이 있던 날이었다.
같이 가줄까 하다가 어차피 올 때 갈 때 방향도 다르니 그냥 집에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지금 가는 중인데 일산 칼국수가 먹고 싶다며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정리하려고 꺼내놓은 책이 책상 위로 한 무더기인 것을 그대로 두고 부지런히 차를 타러 갔다. 대중교통으로는 어떻게 가도 거의 두 시간이다.
전 날처럼 하늘빛이 파랗지는 않았지만 햇살은 투명하고 가을잎들은 온통 화려함으로 물결 친다. 이런 날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드니 그 시간들이 더욱 애틋했다.
커피를 마신다고 뜰이 있는 카페를 검색해서 찾아갔다.
노란빛을 띠는 그 집 시그니처 음료와 커피를 앞에 놓고 또 맥락도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런 시간이 참 오랜만이었다.
침맞으러 간 김에 딸하고 가을데이트를 했다.
구월 학기에 새로 시작했던 일본어 문법반 재수강신청을 하고보니 새로 개설한 강좌가 눈에 띈다. 같이 하는 친구들 모두 한 목소리로
“우리 이거 하자!”
거의 삼년동안 일본한자, 즉 단어만 집중하느라 회화를 하고 싶던 참이었다. 그것도 무려 원어민이라고 한다. 그곳의 수강료는 지금 하고 있는 한자수업보다 거의 두 배 수준이다. 그런 강좌를 갑자기 두 과목이나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된다 싶었다.
K에게 물었다.
“나말야, 좋아하지도 않는 일본어 공부를 한다고 돈을 더 써도 될까?”
대답하지 않거나, 지금 하는 것도 버거워하면서 또 늘리냐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하고 싶은 거면 해야지. 내 경우는 하고싶은 게 없으니 안 하는 거고.”
그래 뭐.
일본어 공부 하는 김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못하더라도
한번 쯤은 눈치보지 않고 용기를 내 봐도 괜찮지 않을까?
넘어진 김에
이왕 시작한 김에
가는 김에
말난 김에 등등
그거 참 소심하지만 바람직한 동기유발 포인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