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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Sep 27. 2021

기적의 만보기

19.8


100미터 달리기 내 생애 최고 기록이다. 추후 알게 됐다. 20초대 벽을 넘지 못하는 내가 불쌍해 그날 체육선생님은 내가 몇 발자국을 뗀 후에야 스톱워치를 가동하셨다는 걸.


학창 시절 내내 달리기 꼴찌를 면한 적이 없다. 친구들은 늘 궁금해했다. 그렇게 가열차게 달리는데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내 달리기를.


나도 궁금했다. 뛰다 보면 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력을 다하는데, 100미터 기록은 늘 22초에서 24초대에만 머무르는지.




추석 연휴기간 중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봤다. 하코네 역전 마라톤 참가를 꿈꾸는 대학생들의 성장기를 그린 만화다.


나름의 사연을 가진 10명의 청년들이 우여곡절 끝에 마라톤에 참여하고 이 성공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또 다른 미래를 개척해간다는 내용이다. 내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년만화 스토리를 따르고 있다.


매년 1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열리는 하코네 역전 마라톤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무려 1920년에 시작했고, 올해 97회를 맞이했다.


총 10명의 선수가 어깨끈을 메고 약 217km를 나눠서 달린다. 한 사람이 평균 20km 남짓을 달려야 하는 거다. 하프 마라톤을 뛰는 셈이다.




이 마라톤에는 딱 21개 팀만 참여할 수 있다. 전년도 10위 안에 들어서 시드권을 확보한 대학 10개. 예선전에서 10위 안에 들어 새롭게 참여할 수 있게 된 대학 10개. 예선전 탈락 대학 선수로만 구성된 연맹팀 1개.


예선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5천 미터를 16분대에 뛰어야 한다. 분당 300미터 이상을 뛰어야 한다는 거다. 100미터 기록이 20초를 훌쩍 넘는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이다.


10명의 주인공 중 달리기에 재능을 가진 이는 딱 두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달리기와 무관한 평범한 이들이다. 아니, 체력이라는 기준에서 함량 미달인 이도 있다.


오타쿠이자 애니메이션 비주얼 센터로 등장하는 카시와자키 아카네는 달리기와 친하지 않다. 힘겨운 노력 끝에 그가 30분 안에 5천 미터를 뛸 수 있게 되었을 때, 예선전 통과는 한참 먼 기록임에도 모든 멤버들이 격하게 축하해줬다.




달리기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애니를 봤음에도 신체구조상 달리기가 쉽지 않은 내가 차선으로 선택한 운동은 걷기다. 운동 어플을 하나 깔고 현재 체중과 키를 입력하니 하루 적정 운동량으로 6천보를 권했다. 오늘까지 5일째 하루 6천보 이상을 걷고 있다.


금요일 저녁에는 큰딸, 아들과 함께 걸었다. 담소 나누며 웃으며 걷다 보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걸었다. 1시간 20여 분 동안 5.8km 정도. 걸음 수로는 9,205보다.


다음날 큰딸이 기숙사로 되돌아가 토요일 밤에는 아들과만 걸었다. 운동시간은 전날과 비슷했는데 계속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는 아들 덕분에 이동거리도, 걸음수도 조금 더 많다. 6.16km를 9,776보로 이동했다.




아들과 둘만의 시간을 갖다 보니 평소에 나누지 않던 이야기까지 하게 됐다. 걸으면서 만보기 앱을 체크하는 나를 보면서 아들이 10년 전 만보기에 얽힌 비밀을 고백했다.


당시 비만체형이었던 아이들에게 운동을 권하면서 만보기를 샀더랬다. 딸과 아들에게 주면서 허리춤에 차고 매일 만보씩 걸으라고 했다. 퇴근해서 만보를 걸었는지 확인도 했다. 아이들은 성실하게 엄마의 기대에 부응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아들이 알려준 엄마 숙제 1만 보 걷기 속성 해법은 걷기가 아닌 만보기 빨리 흔들기였다. 게다가 두 개 만보기를 묶어서 한꺼번에 흔들어댔다고 했다. 밖에 나가서 부지런히 걸어 다니라고 사줬더니, 아파트 방 안에서 신나게 놀면서 다리 대신 팔을 열심히 움직였다는 거다.




성마르기 그지없었던 10년 전 이 만행을 알았다면 아이들을 무척 혼냈을 듯하다. 지금은 그저 웃음을 자아내는 <기적의 만보기> 에피소드에 불과한데...


걷기 며칠 했을 뿐인데 벌써 기록 경신에 집착하게 됐다. 6천보 남짓이 나오는 4km를 목표로 했다. 셋이 걸은 금요일에는 55분, 둘이 걸었던 토요일에는 51분, 혼자 걸었던 일요일에는 49분을 찍었다.


홀로 걸으면 더 빨리 걸을 수 있지만 재미가 없다. 나만의 신기록을 만들어간다는 희열도 반감된다. 역시 뭐든지 함께 해야 신난다.


오늘 고작 월요일이 시작됐는데, 벌써부터 딸이 집에 오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이번 주 금요일, 셋이 함께 4km를 48분대로 끊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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