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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Nov 18. 2021

어떤 귀가

그제부터 합숙교육 중이다. 역량함양을 위한 필수과정이고 담달에 시험도 예정되어 있어 최대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 실습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매 타임마다 첫번째 주자를 자처하기에 동료들 눈에는 꽤나 나대는 이로 인식됐을 법하다.


교육을 받으니 좋은 점이 많다. 일단 시간 확보가 충분히 된다. 9시 남짓부터 오후 6시까지만 교육이고 이후는 나만의  시간이다. 기숙사 방에서 운동도 하고 주말에 있을 불어시험 공부도 한다. 공부가 지겨우면 웹툰을 본다. 가족과 통화하거나 톡도 주고받는다.




나 홀로 방을 쓰니 호젓하다. 20년간 5인 가족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거의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교육생 중에는 25년 전 공부를 함께 했던 분도, 20년 전 연수원 생활을 함께 했던 분도 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끼며 옛 인연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새로운 인연도 신선하다. 한 분은 내가 좋아하는 김미경 대표님의 고향분이자 같은 교회 교인이시라 김대표님 집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짝 풀어주셨다.


맛있는 식사도 즐겁다. 고강도 다이어트는 이번 주까지지만 식단을 지킬 수 없으니  기숙사 밥을 먹는다. 물론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에 양조절은 한다. 어제 아침엔 노른자가 제대로 있는 계란프라이에 찐 감동받았다. 3주 남짓만에 먹어보는 프라이니. 오늘은 메추리알도 배불리 먹었다. 정직한 몸이 먹은만큼 체중으로 보여주기에 오늘밤엔 스쿼트 200개는 해야할 듯 하다.


네이버 블로그엔 과거 오늘 글을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 난 지금 꽤 부지런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0년 전 오늘 포스팅을 읽으니, 그때는 마치 고난의 행군에 참전한 비장한 각오를 한 용사처럼 살았다. 젊고 뜨거웠던 그 시절 회고해보며 남은 오늘도 패기넘치게 보내보자고 스스로를 격려해본다.



어떤 귀가


마음이 바쁘다. 오후에 형님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 시아버지 제사 음식 준비를 위해 일찍 내려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일정이 만만치 않다. 큰 애는 오후에 암사동 유적지로 사회탐구를 가야 한다. 이제는 반이 달라 얼굴 보기 힘든 친구들을 한 달에 한 번 보는 소중한 시간이라 큰 애가 빠지겠다고 할 리 만무하다. 지난 달에 교리공부를 위해 빠졌기에 이번 사탐을 더욱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둘째는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제 딴에 친구라고 여기는 두 명 중 한 명의 생일이다. 둘째 생일에 그 아이 엄마가 각종 선물과 온갖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준비해줬기에 일찌감치 그 애 선물을 사서 전해줄 날만 세어보던 중이었다. 연초 심리상담을 받았을 때 둘째에게는 무엇보다도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기에 이 시간 또한 빼낼 수가 없다.




이런 고민을 토로하고 나니 결론은 하나였다. 내게 유일하게 주어진 토요일 아침, 아이들이 등교한 동안에 전 몇 가지를 부치기. 음식을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준비할 게 많았다. 전 재료도 사야하고 전기 프라이팬도 하나 구입해야 한다. 마트에서 배달이 가능한 시간이 밤 9시까지이니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음식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오랫만에 친정에 전화를 건다.


매일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한 무심한 딸이지만 그런 딸을 나무라기보다는 안쓰럽게 여기는 엄마. 엄마가 평소에 주로 만드시는 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다지 손이 많이 가지 않고 아이들도 좋아하는 새송이버섯전, 동태전, 돈 동그랑땡, 햄맛살전을 하기로 한다. 배달이 가능한 시간에 간신히 맞춰 재료 구입을 얼추 마치고 아이들이 당부했던 아이스크림을 한보따리 샀다.




다행히 전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이마트가 있다. 전기 프라이팬을 보다보니 다이아몬드 코팅이 되어 있다는 가장 크고 비싼 제품이 마음에 든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고 배달을 부탁했다. 그런데 배달이 안 된단다. 정 원하면 아무리 빨라야 토요일 오후쯤 가능하단다. 난 오전에 전을 부쳐야하는데….


갑자기 고민에 빠진다. 좀 더 작은 걸 가리켜봤지만 들어보니 무게는 대동소이하다. 책이 들어있어 무거운 내 가방, 배달이 안 되기에 들고 다니던 아이스크림 한 보따리. 여기에 과장 조금 보태면 내 가슴팍까지 닿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무거운 전기 프라이팬까지 끙끙대며 언덕길을 올라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왔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론은 이미 하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가 남아있을 뿐.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쉬어가며 끙끙대고 옮기다 결국 집에 전화를 했다. 딸래미에게 내 가방과 보따리라도 맡기면 좀 더 자유롭게 내 처치곤란한 커다란 네모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스를 묶은 노끈을 잡으면 이내 손이 아파오고 옆구리에 차면서 걷자니 한 손으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끌리기 일쑤다.


가쁜 숨을 고르며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한참을 쉬고 있으니 그제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큰애와 둘째의 모습이 보인다. 목이 탈 것 같다며 하소연을 하길래 이제 녹아가고 있는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좀 더 무거운 가방은 큰 애에게, 부피는 크지만 무게는 별로 안나가는 아이스크림 봉지는 둘째에게 맡기고 나는 프라이팬을 아예 품에 안았다.

얼마 안 가 이제는 아이들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아이들이 저렇게 커서 이렇게 내 짐을 덜어주는구나 하는 흐뭇한 생각에 미소를 지어본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없다면 오늘 이렇게 힘든 귀가를 할 필요도 없을텐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어떤게 더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아이들과 함께 오손도손 짐 나눠가며 걷는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드디어 아파트 입구. 접촉사고가 나서 잔뜩 찌푸린채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대는 남성 둘이 보인다. 그 옆에 역시나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도 보인다. 그네들의 삶의 무게는 그들이 질테니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하는 내 무심함에 애써 정당성을 부여해본다. 정육점에서 동그랑땡용 다진 돼지고기를 넉넉하게 산다.




그리고도 대략 3~4분을 올라가니 아직 파하지 않은 장이 보인다. 아파트 단지 안에 일주일에 한 번 먹거리 장이 선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순대, 옥수수 등을 파는 포장마차는 인기가 많아 9시가 안되어 항상 자리를 정리한다. 남은 건 족발과 목 삼겹 포장마차. 짐도 많고 먹을 것도 많기에 그냥 지나치려다 어머니 얼굴을 떠올려본다.


오늘 아침에 수면내시경을 하셨지만 아무도 동행할 수 없어 홀로 병원에 가서 어지러운 가운데 집으로 오셨을게다. 세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오늘 또 얼마나 진을 빼셨을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장 큰 걸로 하나 골라 써는 중에 막내를 업고 나와계신 어머니를 만났다. 푸석푸석한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이신다. 권해 드리는 족발 한점을 퉁명스럽게 내치며 끝내 사양하신다.

 



  이제 집까지 남은 길은 계단 수십개. 신발도 안 신은 채 할머니 등에 업혀 있는 막내. 엄마 가방을 메고 이리 저리 뒤뚱거리는 큰 애. 아직도 덜 먹은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들고 아이스크림 봉지를 질질 끌고 있는 둘째. 그리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큰 프라이팬에 조금 전에 산 족발까지 손에 들고 위태롭게 계단을 올라가는 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던 중에 문이 열린다. 오른쪽 옆구리에 막내 허리를 낀다. 왼쪽 옆구리에는 가로 70cm, 세로 35cm, 여름철에 부지런히 사서 나르던 수박보다도 훨씬 더 무겁게만 느껴지는 프라이팬을 붙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딸래미가 현관문을 열고 말발굽을 세우는 10초도 채 안되는 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막내와 프라이팬을 마루에 놓으며 나의 1시간에 걸친 귀가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마음도 바쁘고 숨도 가빴던 그 날. 그러나 세 아이 엄마는 힘이 셌다. 힘 센 세 아이 엄마, 오늘도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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