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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바람의 섬

바람의 섬

by 아레테 클래식


군복을 벗은 에녹은 민간인 티셔츠 차림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모자챙을 눌러쓴 리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와, 진짜… 너는 왜 제복보다 사복이 더 잘 어울리냐?”


리사가 살짝 째려보듯 웃었다.

“그럼 나는 평생 군인 하지 말라는 뜻?”


“아니, 그냥… 오늘은 네가 그저 ‘리사’여서 좋아.”


에녹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함께 바람을 맞으며 제주도의 협재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햇살은 투명했고, 바람은 짠 내음 속에 시원하게 불었다. 두 사람은 해변가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대여한 스쿠터를 타고 제주 바닷가 마을을 누볐다. 말없이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리사의 손길에 에녹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릴 땐 바다를 보면 눈물이 났어.”


리사가 중얼거렸다.


“왜?”


“아버지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거든. 근데 한 번도 못 가보고 돌아가셨어.”


그녀는 툭, 그렇게 던지듯 말했지만, 그 말끝에 가벼운 슬픔이 실려 있었다. 에녹은 대답하지 않고 스쿠터를 세우고 그녀를 내려서 안았다.


“그럼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온 거야. 내가 그렇게 믿을게.”


그 말에 리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자, 둘은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외딴 언덕 위에 앉아 문어숙회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에녹은 조심스럽게 하나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건…”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는 리사에게 은색 팔찌를 내밀었다. 팔찌엔 작은 펜던트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안쪽엔 작게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Salvare.


리사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거… 라틴어야?”


“‘구하다’라는 뜻이야. 너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고, 나는 그런 너에게 구원받은 사람이니까.”

그의 말에 리사의 눈이 붉어졌다.


“너 참… 말 참 잘한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말 제일 잘해야 하는 집단 아니겠어? 장차 장교 될 몸인데.”


에녹이 장난스럽게 웃자, 리사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속삭였다.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에녹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멈추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함께 기억하면, 언제든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둘은 협재 해변에 발을 담그고 조개껍데기를 모으며 사진을 찍었다. 해 질 녘, 리사가 그 조개껍데기 안에 작은 쪽지를 접어 넣었다.


“이건 언젠가 다시 찾으러 올 거야. 지금의 우리를, 여기 묻어두고 싶어서.”


그녀가 묻은 자리 위에 에녹은 작은 돌을 얹으며 웃었다.


“좋아. 우리 임관하고, 여기 꼭 다시 오자.”


이 여행은 에녹과 리사에게 군인이라는 엄격한 껍질을 벗고,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마주한 첫 번째 시간이자, 사랑의 본질에 다가선 깊은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기억이 되고 약속이 되었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와 꺼낼 수 있는, 조용하고 반짝이는 기억의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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