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편지
리사에게
리사,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을 아직도 자주 떠올려. 그날의 햇살, 군가가 멈추던 순간의 정적, 그리고 너의 흰 정복 위로 떨어지던 가을빛까지. 사람들은 흔히 그런 장면을 우연이라 하겠지만, 나는 가끔 그것이 꼭 정해진 어떤 장면 같았다는 생각을 해.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이유로 이 길을 걷기 시작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너에게서 나와는 너무 다른 무언가를 보게 돼. 너는 내 안의 침묵을 깨우고, 내가 애써 외면하던 물음을 다시 꺼내게 만들어.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이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나 끌림 이상이라는 걸, 매일같이 느끼고 있어.
그런데 있잖아, 리사. 나는 가끔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는 그 많은 말들이 너무 벅차게 느껴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쓰고, 서로를 너무 일찍 믿어버리면, 결국 그 끝은 상처뿐일지도 몰라.
사랑은 질식과 외로움 사이의 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상대가 숨 막힐까 두렵고, 너무 멀어지면 마음이 식을까 두려운… 그런 거리에서 사랑이란 건 늘 균형을 시험받는 것 같아.
나는 너를 소유하고 싶지 않아. 너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아. 그저 너의 옆에, 너의 경계선에 서서 너라는 사람의 무늬를 바라보고 싶어. 네가 웃을 때, 고민할 때, 멀어질 때, 다시 돌아올 때… 그 모든 순간을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보고, 네가 나를 그 옆에 두는 걸 허락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느껴.
내 사랑이란 이름으로 너를 바꾸려 하지 않겠다고, 네가 나에게 기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야말로,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고 싶어.
나는 아직도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 하지만 너와의 만남은 나를 더 알고 싶게 만들고, 내 안의 상처를 들여다볼 용기를 줘. 너는 내가 나 자신과 화해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
리사,
우리의 사랑이 비록 질식도 외로움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위를 함께 걸어가고 싶어. 경계에 서 있는 너를 바라보며, 함께 침묵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어.
오늘도 내 마음은 네 곁에 있어.
항상 그러하듯.
화랑대에서 에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