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대접에 마셔야 맛이제!
'위이잉!'
커피원두가 회전 강판에 갈리며 신음을 토해낸다.
이게 아닌 것 같은 데, 온몸이 부서져 나간다.
지난 계절 어디쯤에서는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제 겉을 익혔다. 그럼에도 살갗과 달리 속은 연두색으로 창백하다. 겉껍질이 태양과 투쟁하는 사이, 씨앗은 바깥세상을 잊은 채 웅크리고 았었다. 타다가 타다가 지친 살갗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마침내 열매는 나뭇가지를 떠난다. 그 속이 속일까 싶었는 데, 열매의 배를 갈라 뱉어낸 원두는 멀쩡하다.
"아니, 제 겉은 저리도 시꺼멀 정도로 탔는 데, 제 속이 저리도 멀쩡할리가?"
그래서 사후에 보인 속은 새로운 열기를 감당해야 하는 걸까?
알맹이는 냅다 뜨거운 가마 속으로 내던져진다.
알맞게 익도록 휘젓는 작대기 사이로 달그락달그락 원두가 몸을 뒤튼다. 신음조차 묻힌 시간의 회전에서 검게 익은 원두는 품평을 기다린다.
"잘 익었군!"
여태껏 살갗을 찌르던 빛의 광기는 다 무엇이었는가?
제 몸을 다 변색당한 원두는 예쁘게 디자인된 봉지에 감금당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겉껍질의 향연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이젠 모든 참회의 시간을 끝내지 않았는가?
"어서 오세요!"
사람들이 넘나드는 길모퉁이 커피 전문점.
사람들이 진열대를 기웃거린다.
"이 제품은 브라질 고원지대에서 생산된 최고급 커피예요....."
새로운 자유를 얻으리라!
형제 들끼리 옆면을 맞대고 비좁게 앉아 있노라면, 엉덩이에서 쥐가 나고, 봉지에 갇힌 탓에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껍질에 묻혔을 때에도 매양 마찬가지였지만, 여전히 바깥을 향한 탈출은 되잡혀 있던 것이다.
어느 누구인지는 몰라도 커피 원두는 다시금 어딘가로 향한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새로이 자리를 잡은 선반 위로 밝은 목소리가 흩어진다.
"어서 앉으세요. 커피 한 잔 내려올게요. 어제 사 온 건데, 브라질산이라네요."
경쾌한 미소와 함께 나와 내형제 몇은 그라인더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졌다.
"윙!"
갑자기 하늘이 어지럽게 돌더니 우리 몸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태 뜨거운 열기에 태워지고 또다시 갇혀 옴싹달싹을 못했는 데..."
지구를 탈출할 기세로 몇 분을 토악질할 원심력에 버티면서 기계의 회전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에게 외설스런 오물을 뱉어내지는 않는다.
"어머 향이 좋아요! 값어치를 하는가 봐요."
우리가 저항한 것은 어이없게도 인간이 좋아하는 향기를 마구 발산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가 아니다. 이번에는 가루가 된 우리에게 뜨거운 물을 갖다 붓는다. 분말 상태인 우리는 그래도 혹 피할 곳이라도 있는 듯 사방으로 몸을 흩뜨린다. 그런 것에 다소 미안했든지, 이번에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얼음 조각이 우리 곁을 파고든다. 갈아 부서지고 뜨겁게 달궈진 몸은 이제야 조금
시원해진다.
그리고는 찻잔을 따라 수직 상승한다. 인간의 코와 입이 다시 한번 우리를 평가한다. 우리를 질 낮은 존재로 취급할리는 만무하다. 그게 머나먼 땅에서 이곳까지 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말투가 다를 뿐이다. 이런 광경을 지켜본 나머지 동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저 가루에 지나지 않으니 여전히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분쇄기에 부서지고 뜨거운 물에 데고, 마침내 다 우려낸 찌꺼기는 마지막 남은 향을 뿜어내며 화장실이나 거실에 놓일 것을.
가장 마지막은 거름 대용으로 화분에 뿌려지기도 하는 것을...
'힘', '에너지'를 의미하는 '쿠으와'에서 유래(나무위키)한다는 우리 커피는 그렇게 인간에게 지친 몸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몸이 몸이겠는가?
달궈지고 깨어지고 가루가 되는 것에서 에너지를 주입받는 게 아니던가?
이것이 몸인 한, 사소한 몸은 없다. 그런 각골난망을 안다면 몸은 그저 몸이 아닌 것이다. 정말 도래하는 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