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
to. 소영
안녕. 나 진섭이.
오늘 만나자고 한건 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우리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사회시간에 니랑 같은 조 되어서 같이 과제도 했었고.
앞뒤 자리로 앉은 적도 몇 번 있었지. 기억나려나?
니랑 나랑 하도 떠들어갖구
박승일 선생님께 같이 혼난 적도 있었잖아.
추억이 참 많았는데...
그런데 니랑 2학년 때 또 같은 반이 되어서
솔직히 나... 엄청 기뻤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기쁜지를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니를 좋아해서인 것 같아.
여기까지 읽고 소영은 에스키모가 떠나가게 웃었다. 진섭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었다. 소영은 웃음기를 거두고 마저 읽어 내려갔다.
니랑 같이 있으면 정말 즐겁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해서 부담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
그냥 내가 니를 좋아한다는 거지,
사귀자거나 하는 건 절대로 never 아니다. -_-;;
니도 나를 억지로 좋아할 필요 없고
그냥 이런 애가 있구나 하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글구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해.
니 대답이 궁금하다.
답장은 꼭좀 부탁할게.
그럼 이만 줄인다.
from. 진섭
다 읽은 편지를 원래대로 접으며 소영은 진섭의 표정을 살폈다. 진섭은 솥뚜껑같은 손으로 빨대 끝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소영도 말없이 앉아 파르페를 휘적거렸다.
5분 여의 정적. 카페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두 곡 정도 끝났을 무렵, 그 무거운 침묵을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진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다 읽었으면... 뭐라꼬 얘기를 해줘얄 거 아니가..”
여전히 소영의 눈은 못 마주친 채로, 애꿎은 빨대 끝만 꾹꾹 구겨대는 길고 뭉툭한 손가락.
“니이, 글씨 또박또박 잘 쓴다.”
“차암나...... 그게 다가?”
“맞춤법도 잘 지킸네.”
“칫.....”
진섭은 내내 만지작거리던 빨대로 유리잔에 남은 각얼음을 입에 가득 욱여넣었다. 볼이 각진 얼음 모양대로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퉁명스레 뱉었다.
“다 먹었으면, 인나라. 학원 가야된다.”
“이거. 편지. 진짜 고맙다.”
소영은 호수의 수심이 궁금한 아이의 표정으로 진섭의 검은소 같은 큰 눈을 빤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답장, 꼭 쓸게.”
그 순간 진섭은 아직 덜 녹아 큼직한 각얼음 하나를 저도 모르게 꾸울꺽, 삼켰다. 단단하고 덩어리 진 무언가가 진섭의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진섭의 뜨거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얼음덩어리의 경로가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이 새롭고 선선하고 서늘한 기운이 자신 안에 오래오래 깊이깊이 머무르리라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머리가 띵 하니 아파왔지만 진섭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래 뭐, 천천히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