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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24. 2018

청춘의 색@인턴

스물셋. 꿈에 그리던 잡지사에 어시스턴트로 첫 출근하는 날이 왔다. 사실 그 전날 제대로 잠을 못 이뤘다. 더 사실 합격 전화를 받은 날 상대방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떨렸던 나는 "출근하세요."를 제외한 나머지 부연설명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 같은 행동을 많이 했다. 평소에 그렇게 똑똑하진 않지만 감사하게도 눈과 귀가 건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몸들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밥 먹듯이 했다.

 

먼저 나의 첫 실수. 회사는 논현역이었는데 신논현역으로 갔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는다면 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내 뇌와 다리가 그렇게 시켰다. 신논현역으로 가라고. 아니 구글맵에 내 위치(집), 목적지(회사)를 찍고 추천경로 따라서 도착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대체 왜 길을 못 찾아. GPS도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 그리고는 출근 시간이 다다를 때 즈음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 신논현역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전화를 걸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당최 알 수가 없다. 이 또한 내 입이 시켰다. 그렇게 말하라고. 생각할 새도 없이 입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날 채용한 에디터는 친히 "회사는 신논현이 아니라 논현역 근처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마 속으로 출근하라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열정만 가득한 몸 따로 정신 따로인 어시스턴트는 그래도 다행히 출근은 했다. 하기는 했다.

 

할아버지, 진짜 웃긴데요. 진짜 멋있어요. / 영화 인턴

잡지사 사무실은 내가 영화에서 봐왔던 장면과 정확히 일치했다. 서점과 헤어숍에서 즐겨보던 잡지들이 회사를 들어가는 입구에 진열되어 있었고 사무실은 칸막이 없이 뻥 뚫려 있었다.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녕하세요!" 90도 인사를 했다. 그 누구도 내 인사를 친절히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눈으로 흘깃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 하고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때부터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잡지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두리번거렸더니 나를 채용해주셨던 에디터님이 나에게 다가와 "지금 마감기한이니까,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라며 나에게 첫 임무를 주셨다. 한 한 시간가량 그렇게 앉아있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여기 사무실 사람들.. 왜 이렇게 말이 없지?적막해. 무섭다. 많이 바쁜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첫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I love my job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에디터들이 눈을 마주치며 말을 걸었다.

 

Q1: 지금 몇 살이니? 

A1: 23살입니다! 

Q2: 꿈이 잡지 에디터야? 

A2: 네! 학교 선배가 **매거진 에디터인데,

       선배 강의를 듣고 저도 하고 싶어져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Q3: 근데, 이 일 네가 생각하는 거랑 다를 수도 있어. 

       어떤 글을 쓰고 싶은데? 패션? 뷰티? 피처? 

A3: 잘 모르겠어요. 어떤 글을 써야 할지는. 

      근데 저는 정말 잡지사에서 일하고 싶어요. 

      정말 멋진 직업 같아요.

 

      "그래. 오늘부터 열심히 해봐. 

       근데 정말 좋아야 할 수 있어. 이 직업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임무는 독자들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와 함께 일하게 될 에디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나에게 뼈 있는 한마디를 했다. "힘들다고 내일 출근 안 하면 안 돼?" 난 잇몸 만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제 직업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  / 영화 프란시스 하


나를 제외한 모든 에디터들은 편안한 복장과 굽 없는 신발을 신었다. 그렇게 예상과는 다른? 장면들이 보일 때 

즈음, 몇몇 에디터들이 창고에서 선물 포장하는 나에게 다가와 "그만두면 안 돼~ 그리고 구두는 안 신는 게 좋을 거야."라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해? 넌지시 힌트를 줬다. 그렇게 택배만 약8시간 포장하다가 퇴근을 했다. 또각또각. 첫 출근을 한다고 새로 샀던 구두와 안 입던 원피스는 일회용이 되었고. 

 

그렇게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내가 한 일은 택배 포장이 전부였다.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마감기한 때 일이다. 정식 에디터들은 오전 9시 30분까지 출근인데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편집장님만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그 자리 그곳에 모니터를 응시한 채 앉아 계시는 거다. 제발 추측하고 있는 그 이유는 아니길 바랐다. 무미건조하고 핏기없는 얼굴로 앉아계신 편집장님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내 "응 그래~"라며 로봇처럼 나의 인사를 받아주셨다. 내가 하도 두리번거리니 편집장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다른 에디터들은 어제 새벽에 들어갔어. 나는 마지막으로 체크 한 번 하느라 퇴근을 못 했고." 그 이유만은 아니기를 바랬는데. 

 

그날은 편집장님과 나만 사무실에 있었다. 난 이날도 택배를 포장했고, 편집장님은 충혈된 눈과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자리를 지키다 퇴근을 하셨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까?

 

회사 분위기에 점점 적응해갈 무렵, 도저히 나의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점심을 먹던 도중 질문을 던졌다. 

Q4: "기자님은 제 나이 때에 꿈이 뭐였어요?" 

A4: "난 중학교 때부터 잡지 기자였어. 다른 건 꿈꿔본 적이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밤낮없는 이 생활을 반복하려면 나도 어렸을 때부터 이 일을 꿈꿨어야 했을까. 잠시나마 꿈꿨던 현장에서 꿈을 이룬 사람들을 마주하니 또다시 무력감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일에 올인하면서도 큰 불만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담담하게 해나가는 열정 있는 그 모습이 나를 또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분명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내는 멋있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내가 그들처럼 멋있어질지는 의문. 자신이 없었다. 

 

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이 내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무지개 빛깔일 줄 알았던 나의 청춘은 

다시 빠른 속도로 허우적대던 

흑백의 그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과연 나에겐, 이런 열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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