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면 늘 긴장한다. 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다가 지금이다! 싶으면 옷장 문을 연다. 때를 놓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낮 최고 온도 기준 10도는 이르고 15도가 넘어가면 늦다. 트렌치코트 얘기다. 어디 한번 멋좀 부려볼까 싶어 입고 나갔다가 현관 앞에 불어닥치는 소소리 바람에 놀라 집에 다시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결혼 전에는 트렌치코트가 네 벌이나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입던 비둘기색 트렌치코트는 소매가 봉긋하고 칼라가 둥글게 둘러 있어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리본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치마를 입으면 산뜻하고 귀여웠다. (물론 내 생각이다.) 두 번째 코트는 무난한 베이지색이었다. 트렌치코트 입는 시기에 길에 나가면 열 명 중 여덟은 입는 딱 그 디자인의 그 색깔. 아주 세련되게 소화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군중에 묻혀 피아식별이 어려웠던 코트다. 그래도 제일 많이 입기는 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코트는 네이비색 숏코트였다. 회사 갈 때 점퍼 대용 걸칠 수 있는 외투로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조금 편안히 입고 싶은 날 후드집업을 레이어드 해서 입었다. 보온성도 챙기면서 직장에 입고 갈 수 있는 정도의 캐주얼함이 있었다. 마지막 트렌치코트는 겉에 레이스가 한 겹 덧대어진 트렌치코트였다. 킬힐을 신고 레드립을 하고 입어야 할 것 같은 화려한 옷이었다. 아이를 낳고 살이 찌고 직장도 그만두면서 입을 일이 없어졌지만 한동안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옷이다.
매일 출근하고 데이트하던 시절에는 그 많던 트렌치코트를 다 입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주부가 되고 보니 일 년에 한 번 트렌치코트 입기가 너무도 어려운 거다. 평소 입는 옷이 스웻셔츠, 청바지에 운동화다 보니 외투는 늘 점퍼에 손이 갔다. 얼마 전에도 평소처럼 입고 아이들 라이딩을 하다가 문득 내가 예쁘게 꾸며본 게 언제인지 싶었다. 나도 봄이 되면 옷도 사고 괜히 화장품도 사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과 꽃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으면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아유. 꽃처럼 예쁘네.' 해주시던 시절말이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자 갑자기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일었다.
가자 꽃놀이! 가서 맑고 고운 꽃의 자태에 감탄하고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지는 꽃의 애잔함과 서글픔을 또 이해해 보자.
벚꽃은 보통 3월 말 4월 초에 피기 시작해 일주일 이내 만개하며 3~5일 이내에 진다. 만개 직전과 직후가 꽃놀이의 절정인데 때를 맞추기가 참 어렵다. 얄궂게도 봄비는 꼭 때를 맞춰 찾아오고 소소리바람은 꽃잎을 떨군다. 만개 시기에 맞춰 꽃놀이 계획을 세워도 비가 오면 끝이다. 소중한 이들과 일정을 맞춰 약속을 잡고 벚꽃 명소로 내달려도 가지에 달린 꽃보다 바닥에 밟힌 꽃 보기가 일쑤다.
이번에는 의지를 가지고 꽃놀이를 계획했건만 실패했다. 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날렸다. 한 달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하필 건강검진 예약을 해두었던 탓이었다. 또 독서모임도 있었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데 신규 회원 세분이나 오시는 날이라 모임을 취소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남편에게 말했더니 조금 늦더라도 주말에 가자고 했다. 아이들 영재학급 수업이 있지만 오전이고 개학식이니 끝나고 가면 될 것 같았다.
주말 아침이 되었다. 신경 써서 화장을 하고 트렌치코트도 꺼내 입었다. 넉넉한 오버핏이라 다행히 잘 맞았다.
오후부터 비예보가 있어 마음이 조금 급했다. 설마 개학식인데 오래야 걸리겠나 했는데 특강이 있다고 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30분이 지나자 강사님은 이제 강의를 마무리 짓겠다고 하셨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억지로 따라온 막내도 이제 끝나는 거냐며 좋아했다. 그렇게 금방 끝날 것 같던 강의는 30분 더 이어졌다. 나는 애가 타서 막내는 지루해서 각자의 이유로 한숨을 쉬었다. 강의가 끝나자 강사님은 질문 있으신 분 손들어 달라고 했다. 맙소사 강사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십 명이 손을 들었다. 1차 좌절.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래도 점심 전에는 끝날 거라 마음을 다잡으니 초등학생들의 열기 넘치는 질문들이 감동스럽기도 했다. 한참 이어지던 질의응답시간을 끝내며 강사님이 마지막으로 질문하실 분 한 명만 손들어 달라고 하셨다. 또 몇십 명이 손을 들었다. 2차 좌절. 막내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엄마. 끝나가는 시간에 질문하는 사람들은 빌런 아니에요?"
"너의 의견에 진지하게 동의한단다."
(가르친 적도 없는데 우리 막내는 세상 이치를 깨닫곤 한다.)
강의를 마치고 나왔는데 하늘이 흐리다. 오후에 내린다던 비가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뚝뚝 떨어졌다. 실망하는 내 마음도 모르고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하... 그래 꽃놀이는 텄으니 밥부터 먹자. 밥을 먹다 보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혹시나 날씨가 개지는 않을까 싶어 창밖을 보니 강풍을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멀리 솟은 나무가 상모 돌리듯 춤을 추는 게 보였다. 온 가지가 요란하기도 했다. 꽃잎 하나 남아나지 않겠다. 확 트인 통창을 자랑하는 식당에 오기를 잘했다. 아예 포기를 하니 맛있는 음식에 집중이 아주 잘되었다.
뭐 어쩌랴. 어차피 벚꽃 엔딩은 벌거숭이 나무이리라. 트렌치코트 한 번 입어봤으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