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3은 완전수라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설이 있고 유교에는 삼강이 있고 불교에도 삼불이 있고 또 단군신화에서도 환인, 환웅, 환검(단군)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 천지의 세계가 완전해지게 한다.
우리 집에서는 아니다. 딸 셋의 관계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완전하고 위험한 관계다. 쌍둥이는 둘만 낳지 왜 동생을 낳아서 이렇게 자기들 고생시키냐고 타박을 하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쌍둥이는 원래 피 튀기는 경쟁관계였다. 막내가 태어나고 공동의 적이 생긴 뒤로는 달라졌지만. 막내가 바닥에서 지내던 때가 가장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막내가 감히 언니들 물건을 건들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열렬한 싸움의 장으로 변했다. 물론 매일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서로 물고 뜯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통하면 하루 종일 잘 놀기도 했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관계는 적대적 공생관계이면서 부모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전략적 동맹을 맺기도 하고 같이 놀기 위해서는 전략적 호혜관계로 자유롭게 변모했다. (아이들을 보며 국제 정세를 읽는다.)
당자의 유동적 관계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라면 피할 수 없는 미디어 전쟁. 우리 집에도 서막이 열렸다. 더 어렸을 때 TV를 자주 틀어주곤 했지만 대부분 부모의 통제하에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패드를 자유롭게 활용하게 되면서가 문제였다. 찾아볼 것이 있다거나 출력할 것이 있다는 말에 패드 사용을 허락하면 아이들은 금방 샛길로 빠졌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되었다. 불렀는데 반응 속도가 느리다거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패드를 반납하지 않아 가보면 여지없이 멍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튜브나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시간을 정해놓고 패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아이들은 어쩌다 생기는 작은 틈을 노려 패드 사용하는 시간을 늘렸다. 수시로 단속해야 했다.
부정사용으로 걸리면 아이들은 서로 누가 먼저 했다며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고발당한 아이는 억울함에 피눈물을 짰고 나머지 녀석들도 결국 혼나서 울고 마는 눈물 엔딩이었다. '우리 집에 스파이는 없고 매국노도 없다.' 가족끼리 서로를 이르고 고발하는 건 너무도 파렴치한 행위니 절대로 하지 말라 했다. 이르는 놈은 더 혼날 거라고 못을 박았다. 잘 알아들었는지 아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심히 단속을 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 스케줄이 다 달라지면서 아이들 한 둘만 남기고 외출하는 날이 생겼다. 외출이 잦아지자 아이들은 용케도 방법을 찾아 젖먹이 아이처럼 갈급하게 미디어에 파고들었다. 급기야 나는 외출할 때 패드를 숨겨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숨겨둔 곳에 꼬마 쥐가 드나든 흔적을 발견했다. 다른데 숨겨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대로 아이들이 온 집안을 뒤지고 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휴대폰 감옥이라는 게 있더라. (대한민국에는 없는 게 없다.) 이 네모난 상자에 집안에 있는 패드를 모두 넣고 세 자릿수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안에 담긴 것이 훤히 들여다 보이게 투명한 상자를 골랐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명백히 감옥에 갇힌 패드를 보고 보물 찾기를 멈추었다. 체념한 것이리라. 그날 밤 어찌나 잠이 잘 오는지 꿈도 안 꾸고 잤다.
하루 이틀이나 지났을까? 0부터 9까지의 수 세 자리를 그렇게 금방 돌려볼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굳이 하자면 0부터 돌려볼 거라 예상하고 나는 986이라는 비밀번호를 설정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첫째는 000을 해 본다음 바로 9로 넘어갔다. 그리고 5분도 안되어 감옥이 털렸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더니 순진한 줄만 알았던 첫째는 경우의 수를 아주 잘 배운 모양이었다.
얼른 뺏어 비밀번호를 다시 바꾸었다. 앞으로는 비밀번호 맞춰보는 시도만 해도 혼나는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착하고 순한 아이들은 정말 다시는 패드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쩌다 필요해서 꺼내보면 배터리가 완전 방전되어 켜지지도 않았다.
어느 날, 막내랑 같이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날따라 맛있는 간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건지 막내는 무언가 결심한 듯 내게 말했다.
"엄마 있잖아요. 비밀 말해줄까요?"
"뭔데?"
"엄마 저 패드 상자 비밀번호 바꾸셔야 할 거 같아요."
"비밀번호 알아냈어?"
"제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바꾸고 나서 언니들한테 제가 말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오호라. 막내는 비밀번호가 노출되었다는 고급 정보를 내게 흘린 거였다. 막내는 패드의 부정사용을 고발하면서 엄마의 신뢰를 얻고자 했고 그러면서 언니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언니들이 엄마 몰래 패드를 하는 게 배알이 꼴려서인지. 상대적으로 제 몫의 패드사용 시간이 적어 기분이 상한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엄마에 대한 충성심인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재설정했다. 쌍둥이는 실망하고 또다시 번호를 뚫겠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든든한 정보원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