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술을 가르치다

by 주원

나는 애주가다. 폭음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술버릇도 없다. 건전하게 술을 사랑하고 즐긴다. 소주를 대차게 드셨던 아빠의 영향인지 성인이 되자 오빠와 나는 자연스레 술을 접했다. 오히려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며 제사나 차례 때 음복을 하게 해주시기도 했다.


술에 관대했던데 비해 통금은 엄격했다. 대학 내내 9시 이전에 들어와야 했다. 10분이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고주망태가 되어 볼 틈이 없었다. 8시부터 잔을 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속도전이었다. 부지런히 잔을 들어도 늘 딱 기분 좋아질 무렵이면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와야 했다. 넘치도록 해봤어야 아쉬움이 남지 않았을까? 집에 갈 걱정 없이 원 없이 마셔보는 게 소원이었다. 결혼하면 남편과 소원을 이루리라!


결혼하자마자 술이랑 술잔부터 사들였다. 맥주컵, 소주잔, 와인잔, 양주잔까지. 줄줄이 입장하는 술잔과 술에 남편은 기함했다. 이걸 대체 누가 다 먹냐고 했다. 나는 집들이 두어 번 하면 끝날 양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몇 번의 집들이가 끝나도록 딱히 남편이 취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가 왔구나!

심혈을 기울여 티브이 프로그램을 고르고 예쁘게 안주까지 세팅해서 맥주를 땄다. 캔 뚜껑 터지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며 우리는 짠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마시다 보니 한 캔을 다 마시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캔을 다 비운 내가 맥주를 더 가지러 냉장고에 다녀온 사이.


남편이 소파 뒤로 목이 꺾인 채 잠이 들어 있었다!(의식을 잃은 건가? 목이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황당할 때가? 놀라서 깨워보니 살아는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일이 힘들었나 보다 했다. 포기할 내가 아니다. 또 며칠 뒤 슬금슬금 술자리를 세팅했다. 기분 좋게 한 캔을 마시고 두 번째 캔을 가지러 다녀오니 역시나!


남편이 또 소파 뒤에 목을 얹고 잠이 들어 있었다. 하아... 잠든 남편을 옆에 두고 혼자 캔을 마저 비웠다. 뭔가 씁쓸했지만 맥주는 시원하고 달았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남편 주량은 고작 맥주 한 캔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술을 가르쳐야겠다.


자고로 술은 어른이 가르쳐야 하는 법. 내가 한 살 더 많기도 하거니와 나는 술에 대해서라면 완전 선배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나는 시골에 살았고, 동네에 한참 가면 양조장이 있었다. 아빠는 늘 말통에 막걸리를 받아다 드시고 남은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넣어 냉장고에 두셨다. 어른들은 김치 하나만 놓고도 막걸리를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오빠랑 나는 옆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어른들의 감시가 소홀했던 어느 날, 오빠가 냉장고에서 주전자를 꺼냈다. 둘이 마주 앉아 조심스레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내가 뚜껑을 들고 오빠가 뚜껑에 막걸리를 쪼르륵 따랐다. 오빠 먼저 한 입 나 한 입. 몇 모금에 얼굴이 뜨끈해졌다. 벌게진 우리는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오빠는 나중에 엄마한테 등짝 한 대 정도 맞았던 것 같다. (오빠랑 나는 원기소를 털어먹고 똥파티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죽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절대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거다. 일단 모델링이 중요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테이블에 안주를 깔면 홀린 듯이 앉았다. 이제 반은 된 거다. 여기서부터는 꾸준함이 중요하다. 나의 꾸준함에 남편은 드디어 안주를 직접 주문하는 성의를 보였다. 육퇴 후 마시는 맥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다는 것을 남편도 깨달았다. 문제는 마시긴 마시되 내가 흥이 나기 시작할 때 남편은 잠이 든다는 거였다.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체력이 문제일 수 있다. 가능하면 푹 쉬고 체력이 좋은 날 도전해 보았다. 허사였다. 남편은 소파를 좋아했고 기대면 잠이 들었다. 목을 딱 받쳐주는 소파가 문제였을까? 혼수로 해온 소파를 버릴 수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마셔야 하나?' 고민하던 때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회사일이 바빠진 남편이 힘들어 죽겠다며 급기야 술을 사서 퇴근하는 날이 생긴 것이다.


'맘마미아!'


과연 고된 노동 후에 알코올은 정화수다! 일이 고되면 고될수록 남편이 술을 사들고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안쓰러운 마음과 기쁜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떠냐고?


토요일 저녁이 되면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는 동네 맥줏집에 걸어간다. 한 잔 두 잔 주문하며 서로 더 시켜라 그만 시켜라 실랑이하다 보면 11시가 넘는다. "이제 집에 가자." 하고 문을 닫고 나올 때면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베프가 된다.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집에 오는 길, 가로등은 늘 흔들흔들한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2화철없는 부부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