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집에서 밥 한 끼 더 먹는 게 방학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삼시 세끼 차리고 먹이고 치우면 하루가 다 간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아이들은 그동안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린 것들의 안부를 물으며 찾아내라 난리다. '본인은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는 말로 대부분의 위기를 넘긴다. 밀려드는 집안일 사이사이 성질 급한 아이들 민원도 번개처럼 해결해 준다. 어쩌다 짬이 나서 잠깐 앉아 핸드폰 좀 볼라치면 막내가 득달같이 달려든다. 설거지할 때나 빨래 갤 때 보는 드라마가 그렇게 아쉽다. (나는 39금 애정신도 보고 싶단 말이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쌍둥이들은 확실히 손이 덜 가지만 막내는 아직도 내 품에 파고든다. 하루 종일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며 눈을 맞추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엄마 좀 쉬게 저리 가서 놀아.'와 '심심해요.'를 주고받으며 사랑과 전쟁을 찍다 보면 속으로 책이라도 읽으면 얼마나 좋을꼬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읽어주는 책도 싫다고 도망가던 막내는 아직도 책 읽기는 재미없다고 한다.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고 대신 손재주가 좋다. 손을 쉬지 못하는 아이니 만들기 재료나 요리 재료를 사준다. 노는 건 잠깐이요 치우는 건 하세월이다. 가끔 언니들이 놀아주면 신이 나서 노는데 늘 울고불고 싸움엔딩이다.
이래저래 고비를 넘기며 지내고는 있는데 탁구 레슨이 있는 화목이 문제였다. 일단 가면 보통 2시간은 걸리니 아이들끼리 있어야 했다. 탁구 열정이 불타오르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매일 해야 할 공부 계획을 짜서 내가 탁구 치러 간 동안에 하도록 했다. 착한 아이들이라 그래도 잘 따라왔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화, 목에 쌍둥이 영어학원 특강이 잡혀버린 거다. 둥이 없이 막내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언니들 때문에 미디어에 일찍 노출된 탓인지 막내는 유튜브고 게임이고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뭐 검색해 볼 것이 있다고 해서 패드를 주면 막내는 금방 인터넷에 영혼을 팔았다. 한 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기에 뭘 하나 보고 있었더니 선정적인 광고를 보고 있었다. 내 불찰이었다. 막내는 아직 혼자 두고 다닐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탁구 코치님께 여름방학 동안 내 대신 막내에게 레슨을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 기회에 막내도 탁구를 가르쳐 온 가족이 탁구를 같이 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날은 얼결에 따라와서 레슨은 잠깐 맛만 보고는 계속 공을 주웠다. 엄마 공치는 동안 책 보라고 만화책을 가져왔는데도 굳이 공을 줍겠다고 했다. 무슨 계모도 아니고 엄마는 공치고 놀고 애는 공 줍고 조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자 언제 끝나냐 집에 언제 가냐 물어대기 시작했다. 정말 아쉽게도 탁구를 얼마 못 치고 집에 와야 했다.
두 번째 날은 그래도 기분 좋게 따라왔다. 첫날은 공도 못 맞추던 아이가 제법 공도 맞추었다. 무조건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냥 손만 들어도 잘한다고 했다. 탁구인으로 만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세 번째 날은 가기 싫다고 했다. 탁구가 제법 난도가 있는 운동이다 보니 공을 맞추는 것도 어렵고 스윙을 제대로 하는 것도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꼬셔서 데리고 갔다. 애달고 다녀본 엄마들은 다 알겠지만 이게 정말 울며 겨자 먹기다. 내가 탁구를 치는 건지 애를 보는 건지 이도저도 아닌 마음이다.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참았다. 방학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면 했고 운동을 해서 몸이 튼튼해지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내가 탁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견딜만했다.
네 번째 날은 안 가겠다고 버텼다. 완강했다. 우리 막내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거다. 대쪽 같은 아이. 내가 이길 수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기에 화가 났다. 내가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서 배려하는데 안 가겠다고? 아이에 대한 실망감과 탁구를 치러 가지 못할 것 같아 서운함이 더해져 얼굴에 열이 오르는데 눈치 빠른 막내가 바로 말했다.
"엄마. 저 대신 도서관 다녀올게요. 도서관에서 책 읽고 오늘 할 공부 다 하고 올게요."
내가 잘 못 들었나? 아니 도서관의 디귿도 싫어하던 우리 막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탁구가 싫었던가? 아니면 엄마 말이라면 듣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던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여 말을 잊지 못하는데 타고난 협상가인 막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도서관에서 할 거 다 하고 엄마가 들어오라는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책 보고 있을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금 얘가 나한테 뭘 제안한 거야? 믿기 어려웠다. 별 기대 없이 탁구장으로 향했다. 바로 막내 전화받고 집에 오더라도 일단 가자.
10분 만에 전화해서 집에 오겠다고 엄마 언제 올 거냐고 물을 줄 알았던 막내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정말 약속한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얌전히 있다가 집에 왔다. 그날 하기로 한 공부를 다 마치고 심지어 시키지도 않은 문제집까지 풀고 왔다.
아니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 속에는 언제 이런 작고 소중한 것들이 영글고 있었을까? 막내라고 아기라고만 생각했던 아이가 혼자서도 잘 해내는 모습을 발견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