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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서른 일곱

대상포진이란 상상

by 주원

"너 눈썹 옆에 뭐가 났네?"

영상통화 중에 제 왼쪽 눈썹 옆에 붉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뾰루지를 보고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부분인데, 생각해 보니 몇 주 전에 눈썹 안쪽에서 생기기 시작한 뾰루지가 눈썹 밖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라는 엄마의 말에 알겠다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대상포진일 수 있다고?!'

다음날 인터넷에 '눈썹 뾰루지'를 검색했습니다. 뾰루지의 모양, 뾰루지가 지나간 자리에 생긴 흉터의 모양까지 똑같은 사진이 첨부된 블로그 글을 찾았습니다. 대상포진으로 진단받아 일주일간 병원을 오가며 약을 먹고 발랐다는 후기였습니다. 혹시 나도 대상포진인 거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어제오늘 유난히 몸이 무겁고 피로했던 것도 대상포진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더해지며 자가진단이 확신으로 변해가던 중 눈 가까이 생긴 대상포진은 시신경에 손상을 줄 수 있어 위험하다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했습니다.


"대상포진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의사를 만나자마자 저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대상포진 여부를 물었습니다. 의사는 눈썹 주변을 살펴보고는 염증은 있지만 대상포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피로감이 심하고 그런데요. 그래도 대상포진이 아닐까요?" 결과만 보면 비교적 가벼운 증상이라 다행인데, 자가진단과 다른 답변을 들으니 마음속에서 인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대상포진이라면 얼굴, 특정 부분에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대상포진일리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30초 만에 진료가 끝났습니다.


마음이 헛헛했습니다. 전문가의 진단을 받고 왔는데 왜 안심이 아니라 의심이 드는 건지. 별일 아니라는데 왜 기쁘지 않고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드는 건지. 속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는 오만함, 더 깊은 마음속에는 차라리 대상포진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뚜렷한 병명이 있으면 무기력한 제 상태를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플 때 받았던 관심과 보살핌이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병원을 나서며 잠깐 내일 다른 병원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사람은 옳은 말보다는 내가 듣고 싶은 말, 안심과 위로를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마음이 약해진 상태일수록 그런 말이 간절해지고, 급기야 찾아 나서게 되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쩍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눈썹 뾰루지 대상포진 소동으로 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우울과 무기력이 넓게 퍼져나가지 않도록 불안한 마음과 외로움을 잘 다독여야겠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지 않으나 따뜻하고 달콤한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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