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마신 술, 100일 단주 도전!
- 다니엘 슈라이버의 책 『어느 애주가의 고백』을 읽으며 단주 해 볼까?
“나는 알코올 의존증입니다.”
어떤 선언처럼 들리지만 처절한 고백이며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이기도 합니다. 다니엘 슈라이버의 책 『어느 애주가의 고백』을 읽었던 때가 2018년 봄입니다. 당시 말기 암과 싸우고 있던 아빠와 병원에 다녀와 혼술을 하고 잠을 청한 날이었어요. 새벽에 빗소리에 잠이 깨어 서점 앱을 뒤적이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라는 부제에 눈이 번쩍, 술을 내 삶에서 빼 버리고 싶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술에 의지하고 있는 제가 별로였거든요. 어쩜 이 책이 술과의 질긴 인연을 끊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설렜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어요. 부끄러운 나의 실체를 대면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해서요.
술 때문에 가장 완벽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에 아프게 공감했습니다. 제가 술과 이별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거든요. 내 소중한 시간을 술에 취해 맑지 않은 정신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취한 상태로 잠들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술과 함께 즐거운 시간도 있었지만, ‘꼭 술이 아니었어도 좋을 수 있지 않았을까?’, ‘술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직은 술을 완전히 끊을 자신은 없었어요. 혹시 그런 결심을 한다 해도 다시 술을 마시게 되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미래의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은 어른들의 술 취한 모습이 익숙한 사회적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는 데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두 아들에게 알코올 의존증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저자는 술을 줄이는 식으로는 알코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단주’만이 답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저는 앞으로 술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삶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혹시 술을 끊은 나에게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술을 마시며 나를 꾸민 적도 있는데 참 피곤하게 살았구나 싶습니다. 이젠 현실을 술로 피하고 싶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제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술과 함께 3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술을 끊고 나면 제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열심히 일했으니 먹고 마시며 스트레스 풀어도 돼!'라는 자기합리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제 음주 생활은 계속됐어요. 술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술을 마셔왔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반가워했다는 스스로 술의 폐해를 느끼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술을 끊고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술을 끊겠다는 옹골찬 결심을 언제 실천할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병명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후로 3년이 지날 때까지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요양 병원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술과 함께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살아온 50년 생애에 술과 함께 한 시간이 30년입니다. 스무 살에 함께 술을 마시며 시작된 친구와의 관계도 30대 중반에 끝나버렸고, 20대 초반에 술자리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20년 넘게 함께 산 남편과도 잠시 헤어졌던 때가 있었는데 두 아들을 가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술을 한 달 이상 안 마셔본 적이 없으니 나와 술의 관계는 어떤 친구보다도 가까이, 오래 지속된 셈입니다.
술이 있어야 좀 더 크게 웃고, 술이 들어가야 좀 더 시원하게 울 수 있었습니다. 술을 마셔야 노래방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래할 기분이 나죠.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일 년 동안 짝사랑했던 대학 선배에게 고백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예요. 남편과 싸우고 난 뒤에도 술로 풀었습니다. 혼술하다 잠이 들거나, 남편과 함께 정신없이 마셔서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를 잊어버리곤 했어요. 골치 아픈 일은 술 마시고 '에잇, 될 대로 되라'며 체념하거나 포기해버리고 스스로 '잘한 거야'라며 합리화했습니다. 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숙취의 괴로움과 함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죠.
술로 인한 실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급한 고백과 경솔하게 시작된 관계로 시간과 마음을 소비했습니다. 무르익기도 전에 따 먹은 열매는 시고 떫었고, 그 뒷맛은 꽤 오래 가더군요. 술 마시고 벌여놓은 일들은 술이 깨고 난 뒤 수습하기에 바빴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쏟아낸 말들, 빈약한 이유나 근거로 저질러버린 행동들, 주워 담기엔 너무 오래되고 너무 늦어버린 제 흑역사가 술과 함께였습니다.
스무 살에 자연스럽게 시작된 음주는 3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했습니다. 2, 30대와는 다르게 40대 이후의 술은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배가 고플 때, 혼자 있을 때, 일이 없을 때, 마음이 복잡할 때,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리고 비 오는 날에 술 한 잔을 기울입니다. 상대가 없어도, 술집이 아니어도, 술안주가 없어도 냉장고를 열어 소주병을 땁니다. 집에 술이 없으면 귀찮아서라도 그만둘 법한데 굳이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술을 사 오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아요. 이 정도면 애착을 넘어 집착이죠? 술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50이라는 나이 때문인지, 30년의 긴 세월이 좀 지겨워졌는지 유독 술과의 이별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30년을 동고동락하면서 헤어질 기회를 수시로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술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서운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와 같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을 테니 제가 절교 선언한다고 해서 술이 신경 쓸 것 같지도 않네요. 그런 면에서 술과 저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도권이 술 쪽으로 한참이나 기운 관계죠. 한 마디로 제가 술에 휘둘리며 30년 관계를 지속해 온 셈입니다.
문득 이 정도 마셨으면 그만 마셔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예 끊을 자신은 없고, 괜히 술 끊었다고 했다가 다시 마시면 모양 빠지는 일이 될까 봐 우선 100일 단주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술을 끊고 삶의 큰 재미를 잃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술을 대신 얻는 것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기대되기도 하더라고요. 나이 50이 되어서야 기꺼이 술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기는 잃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것을 얻기 위한 노력 이상의 것이라고 자신을 응원하며 100일 단주를 이어갔습니다.
- 단주 결심을 굳건히 하기 위해 본 영화 <28일 동안>
알코올 중독에 관한 영화를 검색하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28일 동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산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예요. 알코올 중독자 그웬(산드라 블록)의 갱생원 생활, 28일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그웬은 남자 친구와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예요. 하나뿐인 언니의 결혼식에서 만취한 상태로 대형 사고를 칩니다. 결국 그웬은 법원으로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갱생원에서 28일간 생활할 것을 명령받습니다. 그곳에서 그웬은 여러 가지에 중독된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개성 넘치는 그들과 생활하면서 조금씩 변하게 돼요. 영화의 내용은 진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산드라 블록의 톡톡 튀는 연기가 볼 만합니다.
“작은 것들을 조절하고 던지면 돼. 나머진 남들이 알아서 할 거야.”
의미심장한 말이에요. 우리는 계획을 할 때면 큰 목표에만 신경을 쓰잖아요. 그런데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게 그 과정이지 않을까요? 긴 시간 동안 많은 장애물과 싸워야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당장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 그 작은 것에 집중하고 그거 하나만 해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은 것들의 성공이 나를 큰 목표 앞에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오늘 하루만 술을 마시지 말자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티면 어느 순간 100일이 채워지겠죠?
저는 그동안 제 알코올 의존증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다고 자신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음대로 된 적이 별로 없더라고요. 술뿐만 아니라 살면서 참 많은 것들에 흔들리고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또 후회하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됐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하기 싫은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하면 좋은 것들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끊어내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나는 28일을 넘어 100일 동안 술을 안 마실 수 있을까? 나도 그웬처럼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친구들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들을 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그웬은 28일 동안의 갱생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 술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변하지 않는 남자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이별을 고했고요. 달라지겠다고 결심한 그웬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뭔가 다른 결과를 바라는 사람들을 우린 정신병자라고 부르지.”라는 대사를 들으며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아침이면 결심하고 저녁에는 무너지며 후회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산드라 블록의 <28일 동안>을 보며 제 알코올 의존증을 극복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른 삶을 원한다면 내가 달라져야 하니까요. 술을 안 마시고 28일 넘겼습니다. 100일이 가까워지고 있네요.
난생처음 100일 단주에 성공했습니다. 여수 가족 여행에서 낭만 포차의 유혹까지 참아내며 이룬 눈물겨운 성공입니다. 매일 단주 성공 기념으로 10,000원씩 저축해서 100만원을 만들었습니다. 남편을 비롯해 주변에서 제 의지력에 놀란 눈치예요. 무엇보다 성취감으로 제 자존감이 우뚝 솟았습니다. 쭉 이어갔으면 좋았겠지만, 저와 한 잔을 원하는 남편과 100일 축하 파티를 하며 단주는 끝내고 절주를 결심했습니다. 술 마시지 않는 행복도 좋지만 좋은 사람들과 적당히 즐기는 술의 맛을 완전히 포기할 자신은 없더라고요. 한 번 성공했으니 필요하면 계속 시도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 평생 단주를 결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 두 번째 100일 단주를 결심하고 읽은 책 『금주 다이어리』
두 번째 100일 단주를 결심하고 술을 27일째 안 마셨는데도 몸무게는 겨우 1, 2kg 정도 빠졌을 뿐 눈에 보이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게다가 새벽마다 청량산 정상에 올랐다 오는데도 체중 변화는 전보다 더 더디기만 하더라고요. 빠지라는 살은 안 빠지고 힘이 빠진다고 할까요? 이번에는 100일 단주를 넘어 1년, 가능하다면 평생 술 없이 살아보자 했건만 흔들림 없는 체중에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김영하의 『작별 인사』를 읽다가 같은 출판사 복복서가의 책 중에 『금주 다이어리』가 눈에 띄었어요. 멋지게 금주에 성공하고 이런 책을 쓰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빼앗긴 것 같아 잠시 서운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고집쟁이 체중 때문에 짜증 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시자' 할 것 같은 위기였거든요. 나를 붙들어줄 무언가가 절실했습니다. 『금주 다이어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클레오 풀리(당시 40대 후반, 세 아이의 엄마)는 단주 26일째에 100일 단주를 결심했답니다.
‘와인 한 병에 평균 12.5파운드 정도 지출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열 병 정도 마셨다. 그러면 일주일에 125파운드, 한 달이면 500파운드가 넘는다! 총생활비에서 어마어마한 비율을 차지한다.’
파운드 환율로 계산해보니 한 달 500파운드면 우리나라 돈으로 780,000원 정도였습니다. 내가 마신 술값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소주 2병(오해는 하지 말기를, 매일 이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아닐 거예요)으로 계산해봤어요. 슈퍼에서 사면 4,000원 정도지만(그것도 아끼겠다고 마트를 이용합니다. 마트에서는 소주 2병을 3,000원에 살 수 있거든요.) 집에서 마시게 되면 안주를 준비해야 하는 비용과 시간이 들고 밖에서 마시게 되면 소주값만 8,000원에서 10,000원, 그리고 안주값은 1차에서 최소 4, 5만원 정도는 되죠. 술값 안주값 합쳐서 평균 50,000원이라 치고 매일은 아닌 것 같아 이틀에 한 번 15일로 계산하니 750,000원입니다. 저자나 저나 크게 다를 바가 없네요. 외모 치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우리는 소박한 부부라고 자부했는데 술로 사치를 부리며 살았더라고요.
3개월 전 100일 단주를 끝내고 또다시 3개월 동안 음주 생활로 돌아간 뒤 다시 100일 단주를 결심하고 술을 안 마신 지 이제 겨우 27일째입니다. 제 습관의 초대형 유조선이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인 거죠. 30년 넘게 음주 생활을 했는데 한 달도 안 되는 단주로 내 몸이 확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입니다. 게다가 술 대신 쿠키나 단팥빵 등 전에는 잘 먹지 않았던 간식거리에 자꾸만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술 대신 이거라도 먹자는 심리인 것 같은데 그러니 체중이 빠질 리 만무합니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천천히 습관을 바꿔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걸리겠지만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제가 원하는 결과를 보게 될 거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난 12개월 동안 한 바퀴를 빙 돌아 원래 자리로 온 느낌이다. 천천히, 천천히, 나를 겹겹이 가렸던 것들이 다시 벗겨졌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밑에는 이십대 후반의 내가 있었다.
그리고 내 몸도 찾았다. 체중이 13킬로그램 줄어들었고, 최소 5년은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나의 자존감, 용기, 매력도 다시 발견했다. 이제 다시 나 자신이 좋아졌다.
365일째 p.460
쉰 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술은 방해만 될 뿐입니다. 『금주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100일을 넘어 12개월 후의 제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곳엔 서른 살의 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훨씬 날씬해진 몸으로 멋진 옷을 차려입고, 강연장에 당당히 서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국의 클레어 풀리 이야기 대신 대한민국 이주용의 단주 이야기를 자신 있게 들려줄 그 날을 떠올렸습니다.
두 번째 100일 단주 도전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56일을 이어가다 57일째 비 오는 화요일에 무너져 버렸어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저를 남편이 위로하더군요. 괜찮다고, 그 정도면 대단한 거라고, 필요할 때 다시 또 하면 되지 않겠냐며, 맛있게 먹고 기분 풀라며 술을 따라줬습니다. 좋았습니다. 나의 도전을 응원하고 나의 실패를 위로하고 다시 용기를 주는 술친구가 곁에 있으니 말입니다. 100일 단주에 두 번 도전하고 한 번은 성공하고 한 번은 실패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술을 안 마실 때보다 술을 마시고 있는 지금이 훨씬 즐겁습니다. 100일 동안 한 잔도 입에 대지 말자는 결심을 지키기 위해 제 의지력을 탈탈 털어 썼습니다. 기대처럼 체중 감량의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제 의지력에 스스로 뿌듯해하며 결이 다른 삶을 꿈꿔보기도 했죠. 하지만… 술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결국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술을 찾는 예전의 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제 더이상 음주 생활을 후회와 자책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단주 생활 끝에 술을 진정으로 즐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술 끊어야 할까? 그냥 마실까?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 <어나더 라운드>
술에 관한 또 한 편의 영화 <어나더 라운드>를 소개합니다.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대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남편을 생각하며 재미있게 봤습니다. 지금은 군대에 갔지만 21살 음주 초보자였던 큰아들과 30년 넘게 애주가로 살아온 엄마가 함께 술에 관한 영화를 봤네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술에 대한 긍정일지, 술을 끊어야 한다고 권유하는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영화가 시작되면서 흥미로운 전개에 그냥 빨려들었습니다. 엔딩 씬은 정말 압권입니다. 일어나 함께 리듬을 타고 기립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감탄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적당히 취하고 싶더라고요.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젊음과 열정을 잃어버린 중년의 이야기입니다. 덴마크의 고등학교 교사인 40대 친구 네 명은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힘을 잃어버린 가장들이에요. 각자 조금씩 다른 환경에 놓여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내 남편을 비롯해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의 축 처진 어깨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에게 술은 젊었을 때의 용기와 뜨거웠던 시절의 에너지를 다시 찾게 해 주는 묘약처럼 보입니다. 엉뚱해 보이는, 그들의 술에 관한 실험은 다시 한번 젊음과 열정을 되찾고 싶은 중년의 몸부림 같아서 안쓰럽기까지 했답니다.
부와 성공을 목표로 한다면 술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주 기간에는 술을 안 마시는 날이 더해 갈수록 나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나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부자가 되거나 큰 성공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산다는 게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좀 기운 빠지더군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것이 가끔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코로나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현저히 줄어서인지 적당히 취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100일 단주 도전 후에 다시 술을 마십니다. 어느 날은 기분 좋을 만큼만 적당히 마시지만 아주 가끔은 흠뻑 취하기도 합니다. 술을 마시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더 깊이 음미합니다. 큰 목표를 세우고 흔들림 없이 똑바로 걸어가는 삶 대신 인생의 파도를 리듬 삼아 적당히 흔들리며 살기로 했습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이야기 전달 방식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에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한 잔쯤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혹시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술을 끊기로 결심할 지도 모르죠. 영화 <어나더 라운드> 포스터에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요, 매일 취해 사는 건 심각한 문제지만 가끔 약간 취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