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저런 일'을 선택했을까
나는 '저런 일'인 내 직업을 좋아한다
'저런 일'이란
요양보호사인 내게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요양원에 입소한 어머니를 면회 온 따님. 그분의 자녀도 함께였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며 들려온 말.
"너 공부 안 하면 저런 일 해야 된다."
저런 일이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잘.
요양보호사는 치매노인의 일상생활에서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고 지켜주는 일을 한다. 좀 원론적이다. 풀어보면 치매노인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먹고, 자고, 씻고, 입고, 배설하는 일련의 일들을 조력한다. 환자의 하루를 기록해서 적절한 의료 처치가 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치매노인들의 정서적 지지자로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들의 남아있는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프로그램 진행을 돕는다. 색칠공부, 화초 키우기, 붓글씨 쓰기가 이에 해당된다. 요양보호사의 일들이다.
서두의 그분께서 표현한 '저런 일'은 대소변을 치우는 일과 괴팍하고 느리고 냄새나는 노인을 상대하는 요양보호사의 일이 쉽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더라도 나는 그런 말에 마음을 다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내가 해야 되는 일이거니와 치매노인들에게 그런 일은 꼭 필요한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배설을 원활하게 하는 일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수분 섭취를 잘하지 않는 노인은 더욱 그렇다. 수천 년 전 어느 구도자의 말처럼 뒤로 나오는 것보다 입으로 나오는 것이 더 더러운 것임을 새삼 느낀다. 아, 나는 왜 요양보호사가 되었는가를 말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비위가 상했거나 약하신 분들을 위해 그만 똥똥거려야겠다.
나는 어쩌다 요양보호사가 되었나
2012년이었다. 나는 양평의 작은 산골로 도망쳤다. 몇천만 원의 빚을 졌고 마음은 무너졌고 사람들이 싫어졌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삶을 연명하든 생을 끊든 결말을 내고 싶었다. 폐교를 인수해서 캠핑장으로 활용하던 학생 없는 작은 분교에서 토종닭을 삶고 민물고기를 잡고 허드렛일을 도우며 이년 간 생활했다. 쓰면 써지는 게 글인 것처럼 살면 살아지는 게 삶이었다. 특별히 바쁜 일상은 아니었다. 봄이나 겨울철에는 '산불조심'이라는 완장을 어깨에 걸고 산불을 감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처음 산골마을에 왔을 때의 팍팍한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져 갔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 싫었다. 하긴 마을에 젊은 사람은 나뿐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의도한 데로 혼자가 되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했다. 산불감시원 일이 중단되는 여름이나 캠핑장 손님이 없는 평일이면 너무 심심하다는 거였다. 서울 사람이 잡은 메뚜기를 서울 사람에게 파는 일은 재밌었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사람을 피해 사람들 없는 곳을 찾았던 터였다. 그곳에도 사람들은 있었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냈지만 여전히 혼자였던 시간이 일 년쯤 지날 때였다.
마을 한가운데 교회가 있었다. 교회건물은 벽면을 돌로 마감을 했는데 교회 목사님이 홀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건축설계가 전공인 나는 시골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마을 가운데 세워진 성당 비슷한 모습의 건물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상한 건 마을 사람들은 그 교회를 다니지 않고 큰 고개 두 개를 넘고도 자동차로 십 분을 더 가야 하는 읍내의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내가 뱃속에서 기도 했을 리는 없다. 다만 어머니는 늘 그 점을 강조했다. 교회를 꾸준히 다닌 적은 없지만 이력서에 기독교라고 적어온 걸 보면 어쩌면 모태신앙이 맞는 걸까. 어머니의 앨범 한 면에 붙어있는 내 태아 초음파 사진을 떠올려보면 뱃속에서부터 기도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에서 본 교회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온통 돌로 장식된 벽에서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진 내 인생이 느껴지는 듯했다. 교회는 3층 높이의 뾰족한 첨탑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둔 예배당과 2층 건물로 나뉘어있었다. 두 건물 사이의 땅바닥에 검은 발자국들이 여러 갈래로 붙어있었다. 찍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얀 종이를 비닐로 코팅한 작은 팻말에 적힌 산책로란 글자가 반짝거렸다. 입구에 걸린 나무판에는 인두로 지진 듯한 흔적의 글씨가 쓰여있었다.
'**교회와 **요양원'
서너 명의 노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산책 중이었고 몇몇은 휠체어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회는 조용했고 오래된 수도원의 공기가 흐르는 듯도 했다. 목사님은 동네 사람들이 요양원 노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노인들의 모습을 누가 보고 싶어 할까. 그것도 바로 옆에서 치매노인들을.
'저런 일'과 만나다.
요양원에 들러 청소나 빨래를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봉사를 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순전히 무료한 나를 위해서였다. 요양보호사란 직업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할머니,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하는 할아버지, 어떤 사람은 복도에 소변을 흘리며 걸어 다녔고 어떤 사람은 그런 할머니 뒤를 따라 소변을 닦고 할머니를 씻겨주었다. 치매로 기억을 잃었지만 나를 자신의 무릎에 누인 할머니는 멋들어지게 자장자장 자장가를 부르기도 했다.
목사님은 내게 어르신을 돌보는 데 소질이 많다고 했고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귀찮다고 했다. 요양원에 가는 일을 멈추었다. '사람을 뭐로 보고'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골에서 닭이나 삶고 있으니 나를 우습게 본 거 같았다. 나는 전직 호텔리어였다. 얼마간의 빚과 현재 조금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저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대소변이나 치우는 저런 일을.
며칠이 지나갔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양원에 가면서 내가 근래 들어 처음으로 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인들의 쭈글쭈글한 주름을, 치아가 없어 홀쭉한 입을, 노인 특유의 냄새를 나는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도 느꼈다.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다시 요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할머니 한분이 목욕을 하고 싶어 했다. 요양원에서는 날짜를 정해놓고 어르신 목욕을 해 드리던 터였다. 바쁜 직원들 대신에 내가 어르신 목욕을 자청했다. 뼈만 앙상한 86세의 할머니였다.(할머니라지만 남자 요양보호사가 목욕을 해 드려야 할 경우 보호자와 당사자의 동의가 꼭 필요하다. 이 시기에 나는 봉사자였고 그런 규정을 몰랐다.) 목욕이 끝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다음날 아침, 목욕을 한 그날 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들과의 하루는 언제라도 마지막 만남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6개월 뒤 나는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을 치렀다.
내가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치매노인들의 마지막이, 설령 모든 기억을 잃었거나, 마비가 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일상생활을 홀로 할 수 없을 때라도 존중받는 삶의 끝마침이기를 바란다. 그 일에 내가 도움 줄 수 있기를. 요양원에 부모님을, 배우자를 보낸 가족들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라고 요양원에서 지내는 어르신들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가족들은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일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양원은 죽음을 앞둔 치매노인들이 삶을 연명하는 곳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을 보살피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치매환자 가족들의 책임의 몫을 나누는 곳이다. 요양원이 치매노인들과 가족들에게 기꺼운 쉼을 줄 수 있기를. 그분들과 함께 지내며 치매노인들의 잃은 기억을 찾아내고 그분들이 살아온 한 사람마다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기를. 내가 그러할 수 있기를 꿈꾼다.
현재는 불가능한 꿈이란 걸 알지만
책상에 앉아 숫자로 요양원을 가늠하는 현재의 정책이 계속되는 한, 치매노인을 지역사회에서 흡수하기보다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지금의 요양시설 양성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요양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 에 나는 무너지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어르신들을 뵈면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말을 잊었던 할머니가 몇 마디 말을 찾고 거친 날숨과 들숨의 마지막 순간에 내미는 할머니의 손은 무너진 나를 일어나 뛰게 하는 힘을 준다.
'저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 늙어간다. 우리는 병듦을 피할 수 없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는 보상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있다.
먼저는 내가 이 요양보호사란 일을 꽤 잘한다는 것이다. 보살핌에 대한 기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르신들을 자세하게 살피고 그들의 변화를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감지할 수 있다. 열이 나는 신체의 이상 징후나 우울, 외로움 등 심리적인 변화를 빨리 알아차린다. 이건 타고난 유전자의 힘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그래 왔다. 친구나 주위 사람들의 작은 변화를 잘 알아본다. 그들이 미장원에 다녀왔다거나 새 옷을 입고 온 걸 나는 금세 안다.
둘째는 어르신들이 나를 무척 좋아하신다는 거다. 이마를 맞대고 손을 내밀고 머리를 기대 오신다. 아들이라고, 손자라고, 동생이라고, 심지어 친구 하자는 90세의 어르신까지 있을 정도니까. 어딜 가나 인기 있는 나이지만 요양원에서의 인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하다. 어르신들과 나의 하루를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통해 요양원의 하루가 기록으로 남겨진다. 치매노인의 기억들은 나를 통해 더 이상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살아온 삶은 없다고 믿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역사로 담아내는 일, 이보다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 '저런 일'이라고 비하되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도 내가 요양보호사를 계속하는 이유다. 이 글을 빌어 사회 곳곳에서 '저런 일'을 하고 있는 무명씨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버릇없는 말이지만) 너무나 예쁜 어르신들이다. 그들이 나와 함께한다. 요양원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