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포대교 위에 있었다. 준공 당시에는 서울대교라고 불리던 다리다. 마포구 용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 길이 1,390m의 다리, 한남대교에 이어 한강에 4번째로 놓인 다리, 왕복 10차선의 다리, 2014년 3월 30일에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촬영이 있었던 다리 중간쯤에 2010년 3월, 나는 하릴없이 서 있었다.
마포대교의 높이는 12. 85m다. 서강대교 20.65m, 성산대교 21.86m, 가양대교 23.36m에 비해 높지 않다. 마포대교는 자살대교로 알려져 있었다. 2010년 당시의 마포대교 난간 높이는 1.5m였는데 현재는 1m가 높아졌다. 자살시도가 빈번하자 난간 높이를 손 본 거다.마포대교에서 자살 시도가 뜸해졌다는 뉴스는 반가운 소식이다. 2.5m는 넘기에 높은 벽이다.
나는 두 시간 남짓 마포대교 중간쯤에 서있었다. 1.5m의 난간은 허리만 꺾으면 몸을 넘길 수 있을 듯 보였다. 딱히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강물을 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수중에는 한도 초과된 카드 몇 장이 다였다. 노력 없이 운만 바랬던 일들은 뭐라도 성과를 낼 턱이 없었고 그럼에도 비루한 삶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내와 이혼을 한 터였다. 부모님과 누나, 가족들에게 추락한 내 삶에 대해 차근히 설명할 수 없었고, 이해되지도 않을 것이라 나는 단정했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빼들고 강물을 쳐다봤다. 만져보지 않아도 찬 물이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바람 때문에 강물의 결은 흰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운 한강은 흙빛 물결 안으로 짙은 암흑을 숨긴 것 같았는데, 밤이 깊어갈수록 간간이 어둠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얗고 마른 손들이 물살 사이에서 솟아 나와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망설이지 마라, 어서 뛰어들어라.
그것들은 살아있는 손 같았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마포대교 난간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무덤덤하고 짜증 섞인 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아저씨, 이제 쫌 집에 가세요. 두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다고요."
오른쪽 발을 난간에 걸친 자세로 나는 그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앳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 가슴팍에 새 모양의 마크가 붙은 제복을 입었고, 작고 동그란 차가 그의 뒤에서 비상등을 깜박이고 있었다, 두 눈을 깜빡거리는 자동차 앞에서 감색 모자를 쓴 젊은 청년이 나를 노려봤다.
난간에 걸친 다리를 내린 나는 젊은 청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방향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영등포역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았고 자동차가 신호등에 의지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갑자기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쫄딱 망한 나보다 더 망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큐 프로그램에서 비쩍 마른 아프리카 아이들을 본 적이 있지만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기이했다.
3월의 밤이 꽤 쌀쌀하다고는 하지만 알래스카에서나 어울릴 듯한 두터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야무지게 묶은 종이박스 뭉치를 손에 든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들을 따라 걷기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곳에는 긴 줄이 있었는데, 그들은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 붙어 더 긴 줄을 만들었다. 나도 그 줄의 일부가 되어 줄이 출렁거리며 앞을 향할 때 전진하기 시작했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급식소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밥을 얻어먹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평소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자칭 기독교인이었다. 종교를 묻는 질문에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라고 답해 왔다.
나는 교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나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2010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요양원과 마찬가지로 노숙인 시설에서도 죽음은 자주 목격되었다. 요양원에서의 죽음이 존중받는 죽음이라면 노숙인들의 죽음은 보호받지 못한 죽음이 많았는데, 삶이 끝난다는 점에서는 두 죽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숙인 시설에서 지낸 지 두어 달 만에 나는 노숙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숙인을 씻기고 손발톱을 깎아주고 겨울에 얼어 죽는 노숙인이 없도록 영등포 역사 안이나 길거리를 살폈다. 노숙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거나 예배 시간을 관리하기도 했다.
뻔한 얘기 같지만 사실이니 말해야겠다. 나는 노숙인들을 보면서 마포대교 위에서의 나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 덕분에, 사회로부터 도망쳤다가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2013년 8월, 나는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냄새가 싫지 않고, 그들의 굴곡진 주름이 전하는 이야기들이 참 좋다. 나는 7년 차 요양보호사이다.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어르신을 보살피는 요양원에도 갈등은 있었다.
첫 직장에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선배 요양보호사가 뾰족한 말을 던졌다. 어르신들과 너무 친해지면 안 된다고. 그럼 어르신들이 이것저것 부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너만 힘들어진다고. 적당히 사무적으로 대하라는 말이었다. 그 선배 입장에서는 내게 도움을 주고자 한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따르지도 않았다. 나는 어르신들만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요양보호사가 치매 노인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목격했다.요양보호사의 부주의한 행동이 있었지만 치매로 인한 이유 없는 폭행이었다. 피해를 입은 직원을 위한 공식적인 위로는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비용을 들여 치료를 받았다.
요양원에서 일한 지 삼 년쯤 지나자 요양보호사 일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저인금에, 명절날 일을 해도 수당 따위는 없는 직업, 다른 사람의 대, 소변을 치우는 일, 보호자들에게는 함께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 혹시 부모를 때리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받은 사람, 다른 사람의 부모를 돌보느라 정작 내 부모는 찾아뵐 수 없는, (나는 올해 설날에도 근무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요양보호사의 모습이었다.
어르신들께만 잘해드리면 될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린 것 같았다. 나는 점차 말 수가 줄어들었다.
3박 4일의 휴가를 마치고 출근했을 때였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반갑게 손을 흔드셨다. 나는 인사를 드리려고 그분께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속에서 뭔가를 급하게 꺼내셨다. 빵이었다. 포장지를 보면 카스테라 빵이 분명한데, 빵은 호떡처럼 납작했다. 아마도 나를 기다리며 며칠을 이불속에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먹으라는 표정으로 호떡, 아니 납작한 카스테라 빵을 내 턱 밑에 바싹 붙였다. 할아버지는 빵이 내 입에 들어간 뒤에야 안심하고 웃으실 것이었다.
나는 밀가루를 먹지 못한다. 글루텐을 보통 사람들처럼 흡수하지 못하는 체질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호떡 닮은 빵은 늘 최고의 맛으로 기억된다.
지금까지 백 명이 넘는 어르신들의 마지막 시간을 보았다. 우리 삶의 마지막은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의 며칠 동안 노인과 보호자, 그리고 나는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짧은 들 숨과 긴 날 숨이 반복되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낮은 톤의 그르릉 대는 소리를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마지막 숨을 내쉬고 코의 호흡이 멈췄을 때도, 심장은 여리게 뛴다. 다급한 가족의 요청에 의해 심폐소생술을 해보지만 심장은 서서히 식어갈 뿐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생을 마감할 것이다.
나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 그분들과 몇 개의 약속을 했다.
나는 한 할머니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약속해라, 미안해하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십 수명의 노인들을 살피며 제때에 돌봐드리지 못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처럼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기로 다짐했다.
두려워마시라고, 기도드릴게요. 란 약속은 잘 지켜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가신 후에 나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렸다. 기도란 것이 죽은 이보다 남겨진 이에게 더 위로가 되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 한 분과의 약속인데, 그분은 보호자가 가져온 간식을 이불속에 숨겨두었다가 내가 출근하는 날이면 꺼내 주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가끔 내게 다짐을 받곤 했다. 당신이 죽고 나서도, 넌 이 일을 계속해야 된다라고. 할아버지께서왜 그런 말씀을 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흔들리는 내 마음이 보였던 건가.
사실 요양보호사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나의 부모님은 이미 연세가 많은데, 부모님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겠다.
납작하게 눌린 빵을 내어주고 나를 바라보던 그분의 웃는 얼굴이 아직 선명하니까. 내일이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빵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