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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Jan 31. 2024

단 하나의 소원을 빈다면…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어디선가,

“엄마!”

라는 가늘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몇 차례 더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엄마’라는 외침.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둘러봤는데 내 시야에 그런 목소리를 낼 만한 아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 녹음된 걸 틀었나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열차에서 내릴 때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이미 훌쩍 자라 버린 몸에 비해 아이 같은 마음이 깃들어있던 소년. 그 소년은 앞에 선 엄마의 옷자락을 꽉 쥔 채 또다시 ‘엄마’를 불렀다.

그 모습이 마치, 해님과 달님 동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힘껏 붙잡고 매달린 남매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을 꽉 쥐어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두 사람에 대한 동정의 마음이라기엔, 더 짙고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생의 본질에 대한 슬픔이었다.


생은 고통이다.


하지만 생은 불공평하게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휩쓸어버릴 만큼 거대한 파도같기도 하고, 숨쉬기 힘들 만큼 무거운 바위 같기도 한 고통을 준다. 

내가 엄마가 되서일 테다. 그 엄마가 짊어진 삶의 고통이 마음 저리게 서글픈 것은. 내 삶에도 그런 고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오늘은 그 모습이 내 마음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소원을 딱 하나만 빌 수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빌 것인지 이야기를 했다. 나머지 출연진은 모두 가족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었는데, 장동민 씨만 자기가 건강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자기가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가장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지키기 위해선 자기가 살아야 한다고. 장동민씨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 말에서 그가 견뎌온 삶의 무게가 남들보다 무거웠음을 느꼈다.


나도 생각해 봤다. 단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무얼 빌어야 할까. 아이가 태어나고 항상 나의 소원은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문득 다른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우리 아이를 비롯해 세상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되었으먄 좋겠다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부모가 있든 없든,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든, 몸이 건강하든 아프든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살아보니,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행운권 추첨 같다. 나의 의지와 능력보다, 생이 나에게 부여한 운명이 삶을 결정하는 일들이 허다했다. 앞으로 우리 아이의 삶에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고로 어떤 상황이 되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사람은 결국 다른 존재와 연결되며 행복을 느끼고 성장해 가는 존재이므로, 내 아이와 관계를 맺을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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