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8일 올레 9코스
제주 본섬에 있는 23개의 올레 코스 중 세 번째로 짧은 코스다. 12km. 그러나 짧은 거리에 속았다. 올레 9코스는 장거리인 3코스(20.9km)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별 3개짜리 고난도 코스였다. 박수기정 절벽을 타고 군산오름을 오르는 동안 그늘에서 십분씩 여러 차례 쉬며 수분 보충하느라 거리당 소요 시간이 가장 긴 코스였다. 땀이 비 오듯 하고 종점이 가까워지면서 뒷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다행히 살아남았다.
대평포구를 따라 기이한 모양의 구름과 짧게 눈 맞춤을 하고는 몰질(말길)로 들어선다. 몰질은 고려시대 제주 서부 중산간에서 키우던 말을 원나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마 그때는 지금처럼 숲길이 아니었으리라. 나무가 울창한 몰질에 들어서면 마지막 지점에 이를 때까지 갯내음을 맡을 수 없다. 오늘은 바닷바람에 땀을 말릴 수 없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발걸음이 후끈후끈하다. 시작부터 사우나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이어지는 월라봉 숲길과 밭 사이로 난 길에서 길냥이와 인사를 나누고, 간간이 올레 리본을 확인하다 하늘이 열리는 그늘에서 잠시 쉬어간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늘마다 쉬어가야 할 것 같다. 투박한 산방산 너머로 야트막한 송악산까지 이어지는 해안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절벽 바위, 섬 그리고 하늘 모두 시야가 맑다. 군산오름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충분히 눈에 담아둬야 한다. 이 더운 날 사서 고생하는 낙은 ‘산과 하늘과 바다의 푸르름 감상’을 위해서이다.
소철이 빽빽이 자라고 있는 밭 주변에는 뙤약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철꼬리부전나비 여럿이 풀 위를 날고 있다. 제주에는 1,950m 높이의 한라산이 있어 지형적으로나 기상학적으로 외래 곤충들이 자연스럽게 머물다 갈 수 있는(경우에 따라서는 눌러 앉기도 하는) 조건이 된다. 체구가 작은 곤충들은 편서풍이나 태풍을 타고 날아오다가 한라산에 의해 풍속이 떨어질 때 자연스럽게 하강기류를 타기도 하는데, 서귀포 일대가 그네들의 첫 기착점으로 금상첨화이다. 특히 군산오름 일대에는 남방오색나비처럼 바람길을 따라 날아오는 나비(미접)들을 해마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아마 지금 내 눈앞에서 배회하고 있는 소철꼬리부전나비들도 따뜻한 남쪽(대만 또는 오키나와 등)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제주에서 사계절을 건강하게 보낸 후손일 수도 있다. 소철꼬리부전나비는 2006년에 서귀포 하예동에서 발견한 종이 처음 소개된 후 매해 8월 이후부터 늦가을까지 볼 수 있는 나비이다.
군산오름 정상 절벽 바위에서는 멀리 동쪽으로는 범섬, 문섬, 섶섬에서부터 남쪽 끝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파노라마가 이어진다. 오름 정상에 길게 누운 올레 ‘간세’도 개성 넘치고 한라산 정상을 완벽히 가려버린 흰 구름 띠와 마을의 반은 하얀 비닐하우스 지붕으로 덮여있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비닐하우스가 이렇게도 많다니, 저 안은 얼마나 더울까? 상상하지 말자.
군산오름 숲길을 내려오면 바로 창고천이다. ‘안덕계곡 창고천은 1100도로변 삼형제오름 주변의 고산습원에서 발원’한 하천이라는데 도대체 어디쯤에서 오염된 건지 계곡물 상태가 영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무태장어를 비롯해 여러 수생생물들이 산다고는 적혀있지만 양재소의 빛깔은 초록빛 나뭇잎조차 비출 수 없을 정도로 탁해 있다. 안덕계곡 상록수림지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는데 계곡 사이마다 점선처럼 이어지는 작은 내와 소에서 노니는 물잠자리는 정작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으니.
목덜미에서 스멀스멀 통증이 밀려온다. 다행히 월라봉 서쪽 기슭을 따라 진모르동산을 내려오자 숲길이 끝났다. 개끄리민교를 건너 창고천의 기이한 절벽 끝자락에 자리한 화순리 선사유적을 뒤로하니 황량한 공원이 나오는데 ‘남제주 나누리 파크’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추억을 공유하는 행복한 장소’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친절한 안내판과는 달리 몇 년 전 파종했는지 알 수 없는 버들마편초 줄기들과 일부 풀꽃 무리만 망초 무리에서 앙상하고 지속적인 관리 없이 방치된 지 몇 달(아니 1년 이상)은 족히 넘은 것 같다. 어디나 새로 심기만 하고, 새로 만들기만 하고, 꾸준히 관리하는 일에는 소홀하니. 목덜미 통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온다.
빨리 바다를 보자, 가능하면 먼바다로 시선을 뻗어보는 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251-1 직행을 타고 관광대에서 갈아탄 뒤 무수천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가능한 한 빨리 잊는 거다. 안덕계곡의 탁한 물빛과 나누리 공원의 휑함 따위는. 다음 달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바닷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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