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누군가 내게 한 달 살기 여행지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키아마를 첫 번째 후보로 올려야겠다 싶습니다.
호주 여행 책자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파도가 바위틈 사이로 들어가 거대한 물기둥을 줄기차게 혹은 시시때때로 만들어 내는 곳. 이 사진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으로 출발한 여행지 키아마(Kiama)는 시드니(Sydney)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키아마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기차로 두 시간을 가면 한적한 시골역이 연상되는 키아마역에 도착합니다. 대도시 역처럼 번잡스럽거나 어수선하지 않은, 아담하고 소박한 키아마역의 첫인상이 마음에 듭니다.
사진 속 장소를 찾아가는 길은 아기자기하게 이어집니다. 딱 맞는 햇살과 알맞은 바람이 함께 하는 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나만의 멋진 풍경과 마주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건장한 나무 한 그루, 연한 파랑에서 짙은 파랑으로 그러데이션 되는 푸른 하늘, 그리고 저 멀리 고즈넉한 전원 마을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겨 인생 풍경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길을 따라 계속 이동하면 키아마의 랜드마크처럼 보이는 새하얀 색 등대가 나타나고, 해변가에 거의 다다르면 오늘의 목적지 블로홀(Blowhole)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만나게 됩니다. 안내판에는 블로홀이 1797년 조지 배스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블로홀의 원리가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키아마 해변은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백만 년에 걸쳐 약한 부분이 침식되어 동굴이 생겼고, 동굴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리면서 오늘날의 블로홀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물기둥의 크기는 그날 파도의 세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아무리 기다려도 작은 물기둥 조차 보지 못합니다. 오늘은 제법 파도가 쳐서 커다란 물기둥이 불쑥불쑥 튀어 오릅니다.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신비함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풍경을 사진으로만 담는 것이 아쉬워, 두 눈으로 크게 담아 마음속에 꽁꽁 저장합니다.
블로홀 근처에는 여행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 벤치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푸른 잔디와 하얀 갈매기와 저 멀리 광활한 바다를 바라봅니다. 바다의 끝과 하늘의 끝이 만나는 그곳, 수평선까지 한없이 시야를 확장합니다. 마음도 같이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5월, 키아마의 하늘은 한없이 맑고 공기는 무척이나 깨끗합니다. ‘청정(淸淨)’, 단어 그대로의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키아마, 청정이란 단어가 이곳보다 더 잘 어울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키아마의 자연은 순수합니다.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천혜의 자연환경을 마주하니 문득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집니다.
‘해외 도시에서 한 달 살기’라는 체류형 여행이 있죠. 한 도시에 장기간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여행인데요, 누군가 내게 한 달 살기 여행지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키아마를 첫 번째 후보로 올려야겠다 싶습니다. 현지인들 틈에 적당히 섞여 적당한 속도로 지내는 삶. 언젠가 키아마에 다시 찾아올 그때까지 ‘청정’이란 단어의 '실사판'을 마음껏 보고 느낄 수 있는 이 마을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 에피소드 주제곡 ♫
▶︎ Pokarekare Ana // Hayley Westenra
▶︎ https://youtu.be/WVqqBXY38y8
▶︎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민요, <Pokarekare Ana>는 ‘파도가 부서지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가(戀歌)>라는 제목의 번안 가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바로 이 곡의 원곡이 <Pokarekare Ana>입니다.
평소에 ‘천상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여가수가 두 명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헤일리 웨스튼라입니다. 그녀의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청아한 목소리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키아마의 풍경이 자연이 보내주는 ‘청정’의 실사판이라면, 웨스튼라의 노래는 인간의 목소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청정’의 실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