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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e May 27. 2023

나는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나는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다. 하늘, 별, 해와 달 그리고 꽃, 바람 그런 것들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등장인물 변요한의 대사처럼 말이다. 이 맘 때쯤 거실 베란다를 열어 놓으면 수제유리풍경이 바람이 왔다는 소리를 낸다. 팅~딩~띵~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으면 시끄럽던 맘과 머리가 맑아진다. 몇 해 전 합정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던 중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앗! 풍경이다. 생각보다 큰 지출을 해 버렸다. 나를 위해 이 정도는 선물해야지 하는 맘으로 예쁜 색으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지금의 저 예쁜 풍경. 베트남 여행 시 선물 받은 풍경과 나란히 걸려 있다. 그러나 베트남 풍경은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왜일까?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나는 스노우 볼을 모으는 취미도 있다. 어린 시절 관광버스로 친구들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 아빠가 사다 주신 색모래가 정체 모를 액체에 담겨 이리저리 조용히 말없이 왔다 갔다 쌓이는 그 싸구려 스노우 볼을 매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여행땐 기념품으로, 쇼핑센터나 대형문구점에 들를 경우 눈에 들어오는 스노우 볼을 모으고 있다. 그것들은 연주할 사람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 위에 쭈욱~자리하고 있다.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나? 몹시 춥던 겨울 동네 학교 앞 문구점 아줌마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니 다른 게 아니고 딸이 뭘 선물한다고 자꾸 포장을 해 달라는데 이게 애들이 살 가격이 아니라서 전화했어. 친구한테 이런 비싼 선물 해 그냥 싼 거사라고 해~" 나는 도대체 얼마이며 물건이 뭔지 물었다. "아니 딸이 가격은 말해도 되는데 뭔지는 말하지 말라내  이거 어떻게 해?" 나는 딸의 선택을 믿었고 포장해서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른의 눈엔 고작 몇 천 원짜리지만 아이들에겐 제법 고가라고 판단했던 문구점 아줌마의 전화가 고마웠다 몇 분 후 딸은 빨갛게 언 그 작은 고사리 손에 싸구려 포장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며  "엄마!!! 생일 축하해~ 엄마가 러시아 여행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거 선물하려고. 빨리 열어봐"

바스락 소리를 내는 반짝이 포장지를 열자 크렘린 궁전이 들어 있는 스노우 볼이었다. 딸은 이런 아이였다. 그래서 난  살아 있기로 살기로 다짐했다. 지금은 나사 사이로 액체가 흘러나와 거꾸로 두었으나 그것을 볼 때마다 딸의 그 예쁜 맘이 그 시절 생일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생지옥의 삶을 버티게 했던 기억이 담긴 눈물의 생일선물이었다.

다시 보아도 이쁘다. 니의 보물 10호중 하나.

용함을 쫓던 난 가끔 유용함과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유용함은 냉철해지지만 유용함을 기질적으로 갖고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럴 땐 그들의 말을 주로 듣는 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난감하다.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닌데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소통과 공감의 접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땐 만남의 횟수는 줄이고 대화의 주도권은 상대에게 줘 버린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는 아주 심플하게 짧은 문장으로 전달한다. 또한 오랜 시간 함께 있지 않는다. 자칫 서로가 피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계를 유지하는 나의 방법 중 하나이다. 중요한 건 공적인 만남에서는 이 방법이 좋다. 그러나 사적인 경우 이러한 만남은 추구하지 않는다.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과 소통과 공감이 될 만큼 나의 그릇은 크지 않으며 시간 또한 아깝기 때문이다.

하노이 롯데전망대에서.

언젠간 베트남 미술에 대해 자세히 글을 쓸 생각이다. 지금 위에 있는 작품은 하노이 롯데타워에 만났으며 당시엔 솔드아웃(팔린 작품)되어 있었다. 작품의 가격이나 작가에 대해 아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작품 속의 색덩어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얽히고 섞여 있어 보이나 지옥구덩이나 베트남 회화에서 많이 보이는 전쟁의 살육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처럼 말이다. 이것은 아직도 전쟁과 식민지매의 아픔과 상흔을 그들은 곳곳에서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무용한 것을 사랑하는 나는 위의 그림 같은 작품을 마주할 때면 삶의 양면에 대해 많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아픔과 고통에 대한 회피는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https://youtu.be/hJHdy2Y4y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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