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전파의 일원으로 작업을 한 '조지 프레더릭 와츠 George Frederick Watts(1817-1904)'는 영국의 역사화가이자 초상화가였던 당대의 이단아였다. 런던의 피아노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화가로서 재능을 드러내 18세에 왕립 예술원(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843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벽화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실력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유학 후에는 예술 애호가인 발레리 캐머런 프린셉과 그 부인의 거처인 ‘작은 네덜란드의 집’에 21년간 머물며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보헤미안적 삶은 기성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불합리한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와츠는 근대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진화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삶의 다이내믹한 에너지와 진화를 표현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 문화의 범주를 넘어 전 인류의 다양한 신화를 진화론적 시각 아래 통합하려 했다. 그것은 때론 보편적인 가치의 상징으로, 때로는 사회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으로 표현됐다. 라파엘전파들이 추구하였던 진실과 자연의 영감 그리고 회화에 새로운 도덕적, 문화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임의적인 규율을 무시하며,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 원했듯이 와츠의 예술의 세계에는 라파엘전파의 사상이 그대로 녹아 있다.
<희망(Hope)/ 존 프레더릭 와츠. 142x1118cm/ oil on canvas/1886/Tate Britain. U.K>
지금 소년은 눈을 가린 채 지친 몸을 자신의 손으로 꼭 쥔 수금(성경에서 주로 나오는 현악기)에 온 몸을 기대어 앉아있다. 소년이 앉아 있는 곳은 마치 지구를 연상시키는 둥근 돌덩이와 같아 보인다. 돌덩이의 아래에는 둥근 구름의 띠와 같이 형상화한 흰 선이 보인다. 그리고 돌덩이 아래는 바로 물이 있는 것 같아 소년과 돌덩이는 정처 없이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소년은 눈을 가렸다.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수금은 지금 현이 다 뜯겨나가고 마지막 한 줄의 현만이 남아있다. 소년은 자신의 눈을 가린 천을 수금에 엮어 묶어 두었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모습처럼 말이다. 그림은 매우 몽환적이며 힘없이 아니 맥이 풀린 듯 관람자로 하여금 공황의 상태를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누군가 그에게 눈을 가린 채 물 위를 부유하도록 밀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소년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저 잔잔한 물이 어느 순간 거친 파도의 숨결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을 느낄 뿐이다. 만약 소년이 물 위를 떠 다니는 것이라면 그는 왜 그 위험한 일을 자처했을까? 조금 더 강한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수금의 한가닥 현처럼 희망이 남아 있음을 믿기 때문일까? 또한 현실적으로 저렇게 커다란 돌덩이가 과연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을까? 이것 또한 소년의 수금에 남아 있는 한줄기 남아 있는 희망과 바램(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 속의 바램)의 상징일 수 있다. 남아 있는 한줄기의 희망과 같이 물 위를 떠돌며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하고자 하는 소년의 마음.
와츠의 '희망'은 전체적으로 희망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매우 우울하며 암울한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위부분과 아랫부분은 색조가 연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그림의 중심 부분은 매우 강한 색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소년 즉 희망이기 때문이다. 소년의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부여잡고픈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와츠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되어있다. 그러나 희망에는 절망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희망이란 없을 것이다. 그 절대적인 희망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시리즈 연작 작품이다. 와츠는 희망을 6번에 걸쳐 작업하였으며, 위의 그림은 두 번째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림들은 각기 다른 색조를 띠고 있다. 위의 그림에 나타나는 초록과 푸른색은 훗날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여는 커다란 계기가 된 작품이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기에 와츠의 연작 중 두 번째 그림을 나는 선택하였다.
<그림 희망의 모델이었던 딘 도로시dorothy dene의 모습>
인생에는 게임과 달리 리셋이라는 기능이 없다. 때로는 리셋 기능이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삶이 우리에게 그리 호락하던가? 리셋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매우 치우쳐 현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현실의 망각은 환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낳게 된다. 나는 와츠의 희망을 보며 저 한줄기 남아 있는 현이 소년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저것은 어쩌면 '희망'이 아닌 '절망'에 가까운 희망고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대학로에서 남동생을 만났다. 정확히 서울대병원 반대편 거리이다. 동생을 만나 즐거운 마음으로 데이트를 시작하려는 순간 낯선 젊은 남성이 나에게 다가와 작은 티켓을 건네었다. 그것은 오늘 저녁 시작하는 연극의 표였다. 나는 남성의 손을 뿌리치기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티켓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받아 쥐었다. 순간 "누나, 이건 저 사람들에게 희망고문이야. 연극을 보러 간다는 뜻이잖아."라고 말하며 내 손에 쥐어진 티켓을 빼앗아 다시 그 남성에게 건네며 "미안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안되네요"하며 말하였다. "누나,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행동에는 확인사살만 있는 것이 아니야. 희망고문처럼 잔인한 것도 없다고." 나에게 말을 건네던 동생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상대에게 영혼 없이 '그렇구나 우리는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라며 상대를 위안하거나 위로하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말이 아닌 희망고문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절망에 빠져 있는 이가 있다면 희망보다는 이성적인 표현으로 그에게 따끔 한 충고의 말을 건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확인사실이 된다면 매우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다. 말에는 늘 주위를 살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위로라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전달되는 나의 말은 매우 귀중한 한 마디가 될 것이다. 내가 힘들 때 상대가 나에게 그러한 위로를 건넨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물론 그것에 대한 답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며 또한 온전히 상대의 몫인 것이다. 나는 그날 동생이 말한 희망고문에 대해 늘 생각하며 쉽게 희망이 싹틀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나의 위로로 인해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것이 어쩌면 잔인한 행동일 수 있다는 그 위험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은 왜 이리 복잡한 것일까? 위로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말을 위해 단어를 선택하여야 하며, 그렇다고 늘 칭찬만을 할 수 도 없으니. 복잡한 삶이기에 더욱 간결한 방법으로 살아가길 나는 원한다. 그것은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너의 행동에는 이런 점이 있더구나. 그런 점은 너에게 이러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앞으로 조심하면 어떨까?' 하고 말한다. 그리고 가벼운 칭찬은 아낌없이 하는 편이다. "어~~ 오늘 왜 더 이뻐 보이시죠?, 어머? 결혼하셨어요. 아기가 있는 줄 몰랐어요.' ,' 저는 영화배우 누구랑 닮아서 깜짝 놀랐어요.'하고 말이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가벼운 칭찬은 상대를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너는 조금만 힘을 내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있을 거야'라는 말은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희망을 갖되 절망도 함께 인정한다면 나의 마음이 그 충격을 적게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희망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는 역기능이 있음을 오늘은 말하고 싶다. 미술평론가들이나 에세이스트들은 와츠의 희망에 대해 한결 같이 희망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희망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늘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자각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희망고문의 그 잔인성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한다. 또한 '와츠의 희망' 속의 소년이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자신의 인생을 흐르는 물에 맡겨 두었듯 우리의 인생도 아웅다웅 힘들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풀어두었으면 한다. 희망이란 우리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 요소이다. 그러나 그저 희망만을 바라는 것처럼 이기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희망한다면 그 희망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게 준비하여서도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절망에 빠지기보다는 자신을 좀 더 위로하고 다독거리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