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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Nov 27. 2021

늦잠을 잤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

어느 취준생의 하루

그날도 보통날이었다. 창밖에서 날아든 더운 바람이 잠을 깨웠다. 째깍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더 요란한 날. 굳이 뜨지 않아도 되는 눈을 뜨고 시계를 본다. 오전 11시. 대충 그 시간쯤일 것 같았는데 오늘도 맞췄다. 이러다 감으로 시간 맞추기 대회에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스스한 채로 침대 맡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몇 개의 스팸 문자메시지 사이로 여자 친구의 '밥은 챙겨 먹으란' 톡이 와있다. 대학시절부터 4년째 사귄 여자 친구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조금 괜찮은 직장에 취업해서 남들처럼 결혼 같은 것도 생각하고 그럴 줄 알았다. 졸업을 하고 석사가 되었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취업문은 더 좁아졌다. 많은 회사에서는 석사라는 가방끈을 부담스러워했고, 노골적으로 이력서에서 석사 경력을 지우라는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 애꿎은 시간만 흘렀다.


여전히 여자 친구는 야근과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했고, 근 2년간을 들어온 그 투정이 질투로 바뀐 것도 아마 이 즈음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자주 싸웠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이유도 기억나지도 않는 사소한 일로 다퉜고, 또 언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여자 친구가 먼저 손을 내밀며 일단락되었다. 


휴대폰을 들고일어나 아침도 점심도 아닌 무엇을 차려 언제 방영되었는지 모를 예능 프로를 보며 먹었다. 대충 그릇을 설거지 통에 던지고는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주에 지원한 업체의 채용 발표와 각종 채용사이트의 새로운 취업공고를 제법 긴 시간을 들여 꼼꼼히 확인했다. 꽤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도 아직 오후 3시. 새로운 버전의 자기소개서를 쓸까 하다가 노트북을 탁 덮어버리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제 뭐하지...' 


침대에 늘어진 채로 케이블 티브이에 그냥 틀어진 예능 프로 몇 개가 시작하고 또 끝난 것 같은데 언제 잠이 들었나 보다. '왜 전화 안 받느냐'는 휴대폰 너머 여자 친구의 투정과 함께 잠에서 깼다. 친구들과 함께 저녁 먹자고 나오라 한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은 하루다. 이후 지루해져 버린 게임을 몇 번하고, 책을 조금 읽었다. 퇴근한 여자 친구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통화를 할 무렵(일방적으로 듣는), 시계는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내일 아침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는 내가 부럽다고 했지만 난 내일 아침에 눈을 떠 갈 곳이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 뭐하지...'


이미 10년도 더 된 일이다. 언젠가 예능프로에서 나온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를 들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내일 뭐하지'가 최대의 고민이던 내 젊은 날, 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한 발씩 내디뎠던 내 커리어,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와 진짜로 내가 무언가를 해낸 것 같았던 지난 10년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계획한 대로 석사 커리어를 이어갈 직장에 취업하지 못했다. 언제까지나 함께일 것 같은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고, 이후 몇 번의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사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의 오늘이 잘못되지는 않았다. 


나는 아마도 평생 그날 자취방에 불어 들어온 뜨거운 바람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의 기분도, 그날의 공기도, 또 그때마다 내 손을 잡아준 수많은 이들도. 이제 그 같은 순간이 들이닥치더라도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최선을 다해 둘러볼 것이다. 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분 좋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이 있어 '괜찮다' 고 나지막이 말해본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도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본다. 그렇게 조금씩 내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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