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양귀자 저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읽었다. 그때도 꽤 유명한 소설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것 같은데, <해리 포터>와 <태백산맥>에 빠진 고삐리에게 이런 연애소설은 한두 장면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대부분은 흐릿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이 최근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20년도 더 된 책이 그것도 요즘 시대와는 어쩐지 먼 결의 제목을 가진 이 책이 다시 읽히는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든 <모순>은 단순히 그때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뜨겁고 서늘했다.
안진진이라는 스물다섯 살 여자의 시선으로 쓰인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가족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문득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는 건 그녀가 겪는 일련의 감정들이 그 시기를 지나왔던 나에게 놀랍도록 낯익었다는 점이다. 소설이 출간된 1998년이나 지금이나 사랑은 여전히 전화기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누르는 걸 망설이게 하고 문득 흘려듣게 되는 유행가에 괜히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어릴 땐 사랑은 언제나 '무엇을 선택하느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안다. 사랑은 '무엇을 포기하느냐'로 정의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모순>이 지금 다시 읽히는 이유는 어쩌면 이 시대가 이 사랑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무엇이고,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놓아야 하는지, 나에게 맞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행히도 이 책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안진진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모순들을 보여준다. 사랑은 선택할 수 있지만, 결혼은 선택하지 못하는 현실. 때로는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결국 가장 멀어지고야 마는 역설. 어릴 땐 절대 이해 못 했던 아니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엄마의 말이 어느 날 불쑥 내 입에서 나오고야 마는 기묘한 감정.
그리고 마지막.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문장 앞에는 꽤 오래도록 서 있었다. 불에 데일 줄 알면서도 불 앞에 서는 선택을 하고야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 실수를 반복하며, 내 안에 조용히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의 층위. <모순>은 바로 그런 시간과 선택, 사랑과 후회의 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 보면 20년 전에 출간된 <모순>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이야기다. 스물다섯의 안진진은 스물다섯을 지날 즈음의 나와도 어딘가 닮아 있고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는 삶 앞에서 무수한 질문을 품은 채 걸어가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이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온 이유도 갑자기 명확해진다. 사랑을 탐구하고 삶을 살아가며 어느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모순을 이해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조금 더 오래 읽힐지도 모르겠다.